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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민간인쇄조보의 발굴과 언론사적 의의
편집국  | 등록:2017-05-30 11:03:42 | 최종:2017-05-30 11:05:1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김영주 경남대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가 이범수 동아대 명예교수와 함께 연구했던 “조선시대 민간인쇄조보의 발굴과 언론사적 의의”라는 논문을 27일 오후 서강대 열린 언론정보학회에서 발표하였습니다.

1577년 <민간인쇄 조보>는 최근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세계 최초의 활판인쇄 민간상업 일간신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민간인쇄 조보> 8쪽 중 선조 10년(정축년) 11월 6일, 15일자에 실린 내용을 각주와 함께 해석한 내용과 최근 오마이뉴스에 올라온 기사를 소개합니다. - 편집자 주

朝報. 丁丑年(1577년, 선조10년) 11月 初6日 발행1)

丁丑十一月初六日, 來初七日無2), 經筵3)
정축년 11월 6일. 다음 날인 7일은 경연이 없다.

恭懿殿4)藥房提調問安入啓.
공의전의 약방제조가 (공의전께) 안부를 여쭙고 (임금께) 글을 올렸다.

【答曰】 全夜至朝, 未能寢睡.
(공의전 왕대비가) 답하기를, “밤부터 아침까지 잠을 잘 수 없었다”
-----------------------------------------------------------
朝報. 丁丑年 11月 15日.

朝已定之事, [灯]論不當, 故不允.
조정에서 이미 정한 일을 맹렬히 논의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1)11월 6일에 발행된 민간인쇄조보의 첫 장이다. 제호를 별도로 두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來初七日 뒤에 '無'를 붙이고 간격을 띄어 ‘經筵’을 적었다. 임금을 존대하는 의미로 띄었다고 전해진다. ‘無經筵’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잘 사용하지 않으나 『승정원일기』에서는 가끔 사용하는 용례이다. 경연을 열면 일반적으로 ‘御經筵’이라 쓰고, 열지 않으면 ‘停經筵’이라 쓴다. <승정원일기> 규장각원본에는 ‘無·御·停’字와 ‘經筵’사이를 한 칸 띄우고 있다.
    
한편, 인쇄조보가 매일 발행되었다면 내일의 경연 개최여부를 오늘자로 기록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중종실록>중종 9년 5월 28일(경인) 기사(“政院啓曰,  ... 明日經筵, 何以爲之. 傳曰, 姑停之”(번역 : 정원에서 아뢰기를, ... ‘내일 경연은 어떻게     할까요’ 하니, 전교하기를 ‘우선 정지하라’)와 <승정원일기>영조 4년 8월 15일(계사) 기사   (“上在昌德宮. 只常參, 停經筵. 李仁復啓曰, 明日常參經筵, 取稟. 傳曰, 停”(번역 : “임금이  창덕궁에 있었다. 상참만 열고, 경연은 열지 않았다. 도승지 이인복이 ‘내일 상참과 경연’에 대해 임금께 여쭈었다.‘열지 않겠다’고 전교하였다”)에서 보듯이 다음날의 경연 개최여     부를 묻는 사례들이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드물지 않게 보인다.‘無經筵’과 ‘停經筵’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3)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일이다. 경악(經幄;經帷)이라고도 한다. 임금에게 경사(經 史)를 가르쳐 유교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왕권의 행사를 규제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강의의 진행방식은 한 사람이 교재의 원문을 음독, 번역, 설명하고 나면, 왕이 질문도 하고 다른 참석자들이 보충 설명을 하였다. 강의가 끝난 뒤에는 정치 문제도 협의[視事]하였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조선 제12대 왕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 朴氏, 1514~1577)를 가리킨다. 본관은 나주(羅州).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박용(朴墉)의 딸이다. 1524년(중종 19) 세자빈에 책봉되고,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전호(殿號)는 효모(孝慕)이다. 슬하에 태생이 없다. 시호는 효순공의인성왕후(孝順恭懿仁聖王后)이고, 능호는 효릉(孝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원당리에 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조보가 유통될 때에 인성왕후 박씨는 매우 위독하여 치료를 받고 있었다. 약방제조는 인성왕후의 안위를 걱정하는 선조의 근심을 덜어드리기 위해 문안의 말씀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성왕후의 병세는 호전되지 못하고 11월 29일 신시(申時)초에 승하하게 된다.(『선조실록』10년 11월 28~29일 기사 참조.)


○ 星變測候單字 5),
           (版心) 【 朝報    丁 十一  十五     一 】
月十四日, 夜密(雲:탈자?), 嗤尤旗 6)所在, 不得看候啓.
○ 『성변측후단자(星變測候單子)』에 “이번
           (版心) 【 조보    정축년 11월 15일  첫 장 】
달 14일 밤은 구름이 짙게 끼어 치우기[혜성의 일종] 소재를 관측할 수 없다”고 아뢰었다.

【觀象監】 蚩尤旗上同.7)
관상감 : 치우기 관련 사항은 <성변측후단자>의 내용과 같다.

【漢城府】8) 啓目9), 京城之內, 牛疫大熾, 專相染斃迄冬不止, 至於駕馬車, 而仆於路, 其倒死之數, 無慮六百餘首是白乎等用良10)今遇公役有車無牛滿庭哀號慘不忍, 聞公役不可緩是如11), 枉示嚴威, 東縳而捶楚爲白良置12)人不能自肩, 他無可駕之物是白去等13), 若坐視其然, 不爲之爲白在如中14), 無以完公役, 而紓民怨是白置15), 凌陰之役, 不遠而邇, 當用車千輛是白沙餘良16)17). 繕工監牒呈內竹箭洞新宮造成, 石子乙18)復役前畢輸入. 亦戶曹以先可19)二百車價上下20)爲有昆21), 及時兮給輸入亦爲白有臥乎所22) 亦當用車二百輛, 同價布乙, 雖俵給車夫, 無以輸入.23)

한성부 : 계목에 따르면, 서울에 우역(牛疫)이 크게 돌아 서로 전염되어 폐사하기를 겨울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고 있으며, 수레와 연결된 멍에를 걸친 채로 길에 쓰러져 죽은 소의 수가 무려 600마리나 되옵니다. 지금이 공역(公役)의 때인데 수레만 있고 소가 없어, 뜰에 가득 모인 사람들이 슬피 울부짖고 있으니 그 참상을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공역을 늦출 수 없다는 말을 듣고 (공역 일군들에게) 위엄을 보이며 옭죄고 매질을 하더라도, 사람 어깨에다 (멍에를) 메게 할 수도 없고 달리 멍에를 씌워 수레를 끌게 할 만한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만약 그대로 좌시하여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공역을 완수할 수도 없고 백성들의 원성을 누그러뜨릴 수도 없사옵니다.
 
능음(凌陰, 얼음 저장창고)의 일을 위해선, 머지않은 가까운 때에 응당 수레 1000량을 써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선공감(공역 담당 행정부서)의 첩정(牒呈, 상달 문서)에 ‘죽전동(竹箭洞, 남대문 근방) 신궁조성에 쓸 자갈을 복역(復役 ; 각 가구별 부과노역인 戶役의 면제) 전에 들여놔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호조(戶曹)에서도 수레 200량의 값을 미리 치러주며 제때에 사들이라고 하였는바, 마땅히 수레 200량을 써야합니다. 따라서 같은 값의 베(布)를 비록 수레꾼들에게 나누어 준다 해도, (수레를) 사들일 수가 없습니다.”
-----------------------------------------------------------
朝報. 丁丑年 11月 19日.

5) 역사 편찬을 비롯하여 천문 기상현상과 지변(地變)을 관장하던 정부의 한 부서였던 관상감  (觀象監)이 조정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다. 성변(星變)·천변(天變)에 속하는 현상들 에 관한 규정, 그 현상들의 관측방법, 그 결과의 기록양식 등에 대해 자세히 적혀있다. (출 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성변측후단자>의 모음집인 《성변등록(星 變謄錄)》 원본 3권이 연세대 도서관에 현재 남아 있다. 조선총독부 관측소장인 와다 유우지가 총 8권을 보았다고 했는데 나머지 5권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이 중 3권(①순치 18년 1월, ②강희 3년 10월~4년 1월, ③강희 7년 1월~2월)을 1999년 연세대학교 나일성 교수가 입수하여 그 복사본을 소장하고 있다. ‘字’는 ‘子’의 誤記.

6) 혜성의 일종으로 꼬리가 깃발을 나부끼듯 구부러진 형상을 보여서 지어진 이름이다. 치우기는 긴 꼬리가 두 개로 갈려져 있다고도 한다(출처, 『한국고전용어사전』, 세종대왕기념사     업회, 2001). 이이의 『석담일기(石潭日記)』에는 요성(妖星), 성혼의 『우계집(牛溪集)』에는 치우기(蚩尤旗)로 기록되어 있다. 『우계집』에 따르면, 치우기가 9월 30일부터 보였으며 12월 15일경에는 겨우 볼 수 있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치우기는 광해 10년 (1618년) 9∼10 월, 현종 9년(1668년) 2월에 다시 나타나고 있다.

7) 혜성 등의 천변(天變)이 나타나면 관상감 관원들은 이를 관측·기록하여 보고서인〈성변측후 단자〉를 매일 제출하였다. 치우기에 관한 사항은 성변측후단자의 내용과 같다는 의미이다.

8) 조선의 수도인 한성의 행정을 총괄한 행정기구.

9) 조선 시대 중앙의 관부에서 국왕에게 올리는 문서 양식이다. 중대한 일을 보고[계啓]할 때는 계본(啓本)의 서식을 썼고, 작은 일을 보고할 때는 계목을 사용하였다. 계목은 담당 승지가 국왕에게 올리고, 왕이 윤허를 내리면 계하인(啓下印 : 계자啓字를 새긴 도장)을 찍고, 윤허한 날짜와 담당 승지의 성(姓)을 적고 수결(手決)한 다음, 계목을 올린 관서(官署)에 그 사실을 하달[啓下]하였다. 그런데 1625년(인조 3) 호패청(號牌廳)에서 계하여 시행을 본 『호패사목(號牌事目)』은 계목의 서식을 따르고 있어서, 계목의 서식이 반드시 작은 일에 대하여 올리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른 관청의 이문(移文)으로 내용이 긴 것은 그 문서를 계목에 점련(粘連, 첨부添付)한다.(출처 : 『기록학용어사전』, 한국기록학회, 역사비평사, 2008)

10) ~로 말미암아 ; ~이옵신 바로써. 민간인쇄조보에서는 이두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두사용은 <조선왕조실록>에선 없지만 『승정원일기』에선 흔하다. 한문 원문 가운데 밑줄을 친 단어들이 이두이다. 

11) ~이다, ~이라고
12) ~하(였)여도 ; ; ~하였으니 ; ~하옵실 지라도
13) ~이옵거든 ; ~이옵는데
14) ~하옵건대 ; ~하옵심에 대하여
15) ~이옵니다 ; ~이옵기에
16) ~이사올뿐더러
17) ~다(종지법어미). 亦과 같다 ; ~히(연결어미 또는 접미사).
18) ~을(를)
19) 아직, 앞서
20) 치러주다, 대주다
21) ~하였으므로, ~하였기에
22) ~하옵셨는 바
23) 정축년(1577년, 선조 10년) 11월 15일, 한양에서 만연했던 우역(牛疫)은 『선조실록』,『선조 수정실록』10년 11월 기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선조실록』10년 11월 기사는 28~29 일, 『선조수정실록』10년 11월 기사는 1일이 전부이다. 우역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부실한 이유는 임란 동안 그 이전의 각사등록, 승정원일기, 사관들의 사초, 조보등의 사료들이 모두 불탔기 때문이다. 한편, 이이의 『석담일기』 (卷之下 萬曆五年丁丑)에는 우역에 대한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577년 <민간인쇄 조보>, 세계 최초 ‘활판 상업일간신문’
김영주 경남대 교수, 경북 영천 용화사 발견 실물 분석… 언론정보학회 발표
(오마이뉴스 / 윤성호 기자 / 2017-05-27)

최근 일부가 발견되어 관심을 모은, 조선시대 선조 10년(서기 1577년)에 발행된 <민간인쇄 조보(朝報)>는 ‘세계 최초의 활판인쇄 민간상업 일간신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27일 오후 서강대에서 열린 언론정보학회에서 김영주 경남대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는 이범수 동아대 명예교수와 함께 연구했던 “조선시대 민간인쇄조보의 발굴과 언론사적 의의”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이같이 밝혔다.

‘조보’는 지금으로 보면 일종의 <관보>다. 조보제도는 여러 가지 여론수렴제도 중 하나로, 승정원의 주서(注書)가 담당 승지의 감독 아래 경향 각지에서 올라온 소식들 가운데 취사선택해 산하기관인 ‘조보소’에서 매일 내면, 각 관청 담당자들이 필요한 기사만을 선별적으로 필사해 관청이나 사대부들한테 전달한 일종의 ‘뉴스 전달’ 제도다.

▲1577년 민간인쇄 <조보> 실물. ⓒ 김영주

김영주 교수에 따르면, 선조 10년 8월, 서울의 민간전문업자들이 의정부와 사헌부로부터 발행허가를 얻어 승정원에서 필사로 발행하던 조보를 목활자로 인쇄해 관청과 사대부 등에 판매했다.

그런데 이는 3개월여만에 폐간되었다. 민간인쇄조보가 3개월 가량 발행된 시점(1577년 11월 28일)에 이 신문을 우연히 보았던 선조가 ‘국가 기밀 누설 가능성’이 있다며 폐간 조치했던 것이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이후 관련자 30여명은 유배에 보내졌고, 활자는 몰수되었다.

민간인쇄 조보가 3개월 가량 나왔다는 기록은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석담일기>, <연려실기술> 등에 나오지만, 실물을 알 수는 없었다.

최근 일부 실물이 발견되었다. 경북 영천 용화사 지봉 스님이 <민간인쇄 조보> 일부를 발견했고, 이는 현재 영천역사문화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런 사실이 지난 4월 17일 <오마이뉴스> 등을 통해 알려졌다.


어떤 내용? 누가 주체?

이번에 발견된 <민간인쇄 조보>는 8쪽으로, 발행 날짜는 선조 10년(정축년) 11월 6일, 15일, 19일, 23일, 24일자이고, 발행 날짜를 알 수 없는 문건 3쪽이 있다.

김영주 교수는 “<선조실록>에 따르면, 1577년 8월부터 발간을 시작하여 늦어도 11월 27일까지 이어졌으므로, 이번에 발굴된 <민간인쇄조보>는 폐간되기 직전의 것으로 여겨진다”며 “인쇄조보의 발행 간별을 살펴보면, 우선 주간보다 자주 발행되었으며 23일 자와 24일 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일간의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판단했다.

크기는 가로 40㎝, 세로 29㎝로, 소책자 형식이 아닌 타블로이드 판형이다. 1면의 행수는 좌우 각각 11행(도합 22행)이고, 1행에는 21~22자로 되어 있다. 김 교수는 “크기가 매우 커서 중간을 접어 판매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1일치는 2장 가량(총 968자)으로 추정된다. 김 교수는 “각 면의 중앙행간에는 ‘조보’라는 판심제(版心題)와 함께 발행날짜(예컨대, 丁 十一 二十三)가 있어 ‘일정 시기에 발행한 인쇄조보’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1577년 민간인쇄 <조보> 실물. ⓒ 김영주

또 그는 “이번에 발굴된 <민간인쇄 조보>에서는 공식명칭인 ‘조보’를 사용하였으며, 필사조보와 마찬가지로 제호는 따로 두지 않았다”고, “서지학 전공자 남권희 경북대 교수에 따르면, 활자는 기본적으로 목활자지만, 금속활자도 10∼15% 가량 섞여 있다”고 했다.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민간인쇄 조보>는 ‘필사조보’에 담겨 있는 ‘국왕의 모든 명령과 지시’, ‘당면 정책과 중요 문제들에 대한 유생과 관료들의 건의인 소장’, ‘건의와 보고에 대한 국왕의 답변’, ‘자연과 사회의 특이 현상’ 등이 담겨 있다.

또 발견된 <민간인쇄 조보>에는 특이한 내용이 들어 있는데 ‘공의전 왕대비(인종비, 인성왕후)의 병환’, ‘소 전염병 창궐’, ‘혜성의 일종인 치우기(蚩尤旗)의 출현’ 등이다. 이 내용은 비슷한 시기의 기록물인 <선조실록>과 <석담일기> <우계집>에도 나온다.

또 <민간인쇄 조보>에는 한효순, 허진, 노직, 허숙, 한수, 유대수, 이정형, 남전, 송응형 등 인물이 등장한다. 이는 <선조실록>에도 등장해 같은 시대 인물임이 검증되는 것이다.

<민간인쇄 조보>에는 25가지 ‘이두문자’가 나온다. 이와 관련해, 김 교수는 “여기서 나오는 다양한 이두 표현은 국문학적 차원에서도 충분한 연구 대상이 된다”고 했다.

누가 주체가 되었을까. 김 교수는 “공개성과 영업성, 독이성(讀易性)을 함께 겨냥한 새로운 정보전달매체인 ‘민간인쇄조보’와 정보전달의 매개자인 ‘기별서리·외방저리·계수주인’, 다양한 고급정보 욕구에 목말라하는 ‘사대부들’, 그리고 새로운 정보상품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서울 소재의 ‘일부 기인’(其人)들 간의 상호관련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선조 때의 일부 기인들이 조정의 신속하고 정확한 고급정보가 필요했던 중앙의 각 관청이나 사대부 및 외방저리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정보매체인 민간인쇄조보를 발행, 판매하여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했다.


세계 최초의 ‘활판인쇄 상업일간신문’

<민간인쇄 조보>는 세계 신문 역사에서 어느 위치일까.

선조 때 <민간인쇄 조보>는 중국 명나라 <조보>를 모방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와 관련해, “우리나라 민간인쇄조보가 세계 최초로 인쇄된 신문은 아니다”는 입장을 피력하는 학자도 있다.

김영주 교수는 “여러 논의들을 종합해 보면, 명나라 조보는 필사본과 활판인쇄본의 중간단계라고 할 수 있는 ‘목판인쇄본’으로 발행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1577년 8~11월 사이 3개월 가량 발행되었던 조선시대의 민간인쇄조보는 ‘세계 최초의 활판인쇄 일간신문’일 가능성이 크며, 같은 시기에 발행되었던 명나라의 인쇄조보는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 일간신문’으로 여겨진다”고 했다.

지금까지 세계 공인을 받고 있는 최초 일간인쇄신문은 <Einkommende Zeitung>(일명 Leipziger Zeitung)이다. 이 신문은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1650년 발행되었다. 그리고 최초 주간인쇄신문은 <Aviso>나 <Relation>로, 이는 1609년에 독일 볼텐뷔텔, 스트라스부르 등지에서 발행되었다.

<민간인쇄 조보>는 일간인쇄신문 기준으로 독일보다 70여년 앞서 발행된 것이다.

▲1577년 민간인쇄 <조보> 실물. ⓒ 김영주

김영주 교수는 “<민간인쇄조보>는 세계 최초 목판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세계 최초의 활판인쇄본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하)>(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인쇄문화대국으로 명실상부하게 만방에 선포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했다.

김 교수는 “민간인쇄조보는 선조의 탄압정책으로 대략 3개월만에 폐간되는 비운을 맛보았지만 영리를 목적으로 민간인이 발행하고 활판인쇄술을 세계 최초로 채용하여 발행하였다는 점에서 세계 최초의 ‘활판인쇄 상업일간신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28988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4210&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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