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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꿀 수 있는 100권의 책 29
김갑수 | 2017-12-13 17:05:3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1970년대 소련의 내부 절정과 외부 위기 ⑬

1964년 10월 흐루쇼프가 은퇴한 후 ‘브레즈네프(서기장) - 코시킨(수상)’의 양두체제가 성립되었다. 브레즈네프는 복지 향상에 힘을 쏟았다.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새로운 연금법으로 혜택을 입게 되었고 주 2일 휴일제가 전면 시행되었다.(1967년) 과학기술이 진보하면서 산업이 성장하여 미국과의 산업생산 격차가 1950년의 3.6 : 1에서 1970년의 1.2 : 1로 줄어들었다.

이때가 바로 소련 경제의 전성기였다. 노동자 비율이 전 국민의 60%에 이르렀고 농민에 대한 지원정책도 활발히 이루어져 농민들은 도시 지식인층에 못지않은 생활과 교육혜택을 받게 되었다. 자본주의 국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한 연금, 보험제도가 시행되었고 12년 무상의무교육과 무료진료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소련인은 책을 가장 많이 읽는 국민이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풍요와 사회 안정은 정체와 부패를 낳았다. 소련 사회는 급속히 개인주의적인 폐쇄성을 띠어갔다. 무엇보다도 폐쇄적인 관료체제가 문제였다.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던 미국과의 전략무기제한협상이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으로 균열되기 시작했다. 1969년 체코에서 개혁파 두브체크가 집권하면서 자유화운동이 일어났다. 소련은 무력진압을 결정했고 사태 확산을 두려워한 다른 동구권 권력자들이 이에 동조했다. 이에 따라 소련과 동유럽 4개국 군대로 구성된 진압군이 프라하에 진공하여 자유화운동을 진압하고 두브체크 정권을 붕괴시켰다.

이에 대해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의 동유럽 국가들은 주권침해라고 소련을 비판했고 서유럽 국가들 역시 일제히 소련을 비난했다. 중국은 이보다 더욱 심한 비난을 퍼부었다.

중국은 소련을 사회주의의 외피만 썼을 뿐 실제로는 서방제국주의 국가와 다를 바 없는 사회제국주의국가라고 규정했다. 중소분쟁은 국경문제로까지 비화하여 1969년 우수리 강의 다만스키 섬에서 양국의 무력 충돌이 발발했다. 이로써 중소관계는 적대관계가 되었다. 중국은 미국과 화해하면서 소련을 제1의 적으로 돌렸다.

소련은 쿠바, 베트남 등의 국가와는 친선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베트남 전에서 소련은 중국과 함께 북베트남을 지원했다. 체코 개입이 소련의 실책이라면 베트남 전 개입은 미국의 실책이었다. 1975년 베트남에서는 통일인민정부가 들어섰고 라오스와 캄보디아에도 독재정권을 물리치고 인민정부가 수립되었다. 한편 칠레와 니카라과에서는 반제혁명이 성공했지만 미국의 집요한 공작과 개입으로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1979년 이루어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출병은 전쟁이 장기전으로 이어지면서 소련의 국제적 입지와 경제 사정을 악화시켰다. 소련은 1970년대 들어 사회주의체제가 세계적으로 확산된 것과는 달리 차츰 곤경과 위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역시 폐쇄적인 관료체제가 문제였다. 소련은 경제성장이 눈이 띄게 둔화되었지만 특권층은 오히려 늘어났다. 1982년 브레즈네프는 소련의 위기를 방치한 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후임에 68세의 안드로포프 전 국가안보위원회(KGB) 의장이 서기장에 취임했다. 그는 개혁과 세대교체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젊은 고르바초프의 능력을 인정하여 그를 지도자급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안도르포프는 개혁의 청사진을 펼치지도 못한 채 15개월 만에 병사했다. 이어서 74세의 체르넨코가 서기장에 올랐지만 그 역시 1년도 안 되어 죽고 말았다.


페레스트로이카’, 고르바초프의 좌절 ⑭

최소 4반세기 동안 미국과 양극체제를 구축하며 세계 사회주의체제의 정점에 있었던 소련은 왜 그리고 어떻게 해체되었을까? 소련이 해체되자 동구권 사회주의 정권들도 연달아 붕괴되었다. 세간의 평가대로 소련과 동구권 정권들의 붕괴는 과연 사회주의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런데 소련과 동구권은 몰락했는데 어째서 중국과 조선, 베트남, 쿠바 등은 여전히 건재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러시아 역사를 공부하는 데 여기처럼 긴요한 대목은 없다.

원래 소련은 인구의 20%를 점하는 소수민족을 포함, 무려 120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였다. 소련 인구의 절반은 러시아 인이고 여기에 우크라이나 인과 벨로루시 인을 포함한 인구 중 70%가 슬라브 인이다. 소련은 15개 공화국이 연합한 국가였다.

이 많은 민족을 하나로 묶은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이데올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련의 해체는 바로 이데올로기의 해체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념을 변화시키는 것은 경제이다. 소련이 해체된 것은 경제적 요인이 야기한 이념적 변화 때문이었다. 이념은 일부의 인간에게만 중요하지만 경제는 모든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다.

소련 경제를 침체시킨 주요인은 폐쇄적인 관료체제였다.(관료체제의 폐쇄성만큼 나쁜 것이 또 어디 있으랴? 결과 소련에는 ‘노멘클라투’(원래는 유명인사 명단이라는 뜻)라는 특권층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부패한 관료주의를 파생시켰다. 그들은 사회의 요구에 자신을 적용시키려 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방어벽을 쌓았다. 아이러니 하게도 계급 타파의 주역들이 또 다른 특권계급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특권계급의 형성은 상대적으로 소외계급을 만들어냈고, 이것이 옆으로 새어 지역 소외를 심화시켰다. 당연히 소외 지역민들은 불만을 가졌고, 우대 지역민들은 소외 지역 때문에 자기들의 이익이 침해된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부유한 지역이었던 발트 3국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인들의 불만이 가장 높았고, 제일 먼저 연방에서 탈퇴한 것도 그들이었다.

1980년대 들어 소련은 실질경제성장률이 제로 수준으로 떨어졌다. 관료주의로 인한 물자의 낭비와 비효율성이 극명하게 나타났다. 경제적인 위기를 민감하게 느낀 국민들은 국가와 사회보다는 자기와 자기 가족 챙기기에 급급하게 되었다.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범죄와 알코올 중독이 늘어나면서 사회 기강이 급속도로 이완되었다. 이른바 사회 붕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1985년 3월 젊은 고르바초프(54세)가 당 서기장에 부임했다. 그는 부임 일성으로 ‘글라스노스트(개방, 공개, 자유)를 내놓았다. 한 달 후 그는 ’사회경제 발전의 가속화‘를 강조하고 대외적으로는 미국을 방문하여 대통령 레이건을 만났다. 러시아 국민뿐 아니라 온 세계가 그의 언행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련이 가진 모순의 골은 깊었다.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페레스토로이카(총체적 개혁 재건)’을 제창했다. 그는 시베리아 극동 권에 있는 하바로프스크에서 ‘페레스토로이카는 혁명’이라고 선언하여 세계를 다시 한 번 놀라게 했다.

그는 직접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제목의 책을 쓰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페레스토로이카는 사회주의를 강화시키는 것이며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님’을 특별히 언급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민주적 사회주의’였다. 그는 민주적인 계획경제에서 시장이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 체제를 원했던 것이다. 그의 주장에는 기업을 비롯한 ‘국유재산의 사유화’ 같은 것은 없었다.

앞질러 말해서 불세출의 개혁가 고르바초프의 ‘민주적 사회주의 건설’은 왜 실패했을까? 나는 여기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을 하나만 말하라고 하면 ‘보리스 옐친’이라고 답하겠다. 옐친을 급진개혁파라고 부르는 데에는 어폐가 있다. 이런 칭호를 먼저 붙인 것은 미국과 유럽의 서방세계 언론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옐친은 보수파 리가초프보다 퇴행적인 인물이었다.


자질 부족의 옐친, 고르바초프를 허수아비로 ⑮

페레스트로이카가 진행되면서 소련의 정치세력은 다시 분화하기 시작했다. 크게 보아 그들은 고르바초프의 개혁파, 리가초프의 보수파, 옐친의 급진파, 세 부파로 갈라졌다. 페레스트로이카 이전 이 세 부파는 비슷한 정치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페레스트로이카 자체에는 모두 찬성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개혁의 속도일 뿐이었다. 그러나 정말 다른 것은 권력을 자기가 가져야 한다는 각자의 욕망이 아니었을까? 옐친은 1987년 10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개혁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비난의 포문을 열었다. 옐친은 보수파 리가초프를 특정하면서, 그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소극적인 데다 당 서기국을 비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리가초프의 보수파는 1988년 3월, 안드레예바로 하여금, 스탈린의 공적과 사회주의의 전통을 옹호하고 개혁의 과도한 진전을 공격하는 반박 논문 ‘원칙을 포기할 수는 없다’를 발표하게 하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이렇게 되자 고르바초프는 급진파와 보수파 사이에서 양편으로부터 동시에 압박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옐친의 급진파가 사회주의의 울타리를 일탈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급진파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자체 법칙에 따라 병행 발전해갈 수 있다는 개혁파의 견해를 문제 삼으며 경제정책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주식회사제이며 자본주의적 시장요소를 대폭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다당제를 수용하고 사유재산을 인정하며 완전한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면서 사회주의 자체를 부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문제는 당시의 러시아 여론이 심하게 선동되고 왜곡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미국과 유렵의 권력자들과 언론들은 사회주의를 부정하려는 세력을 민주세력으로 규정하면서 음과 양으로 줄기차게 지원했다. 결과 1989년 3월 인민대의원 선거에서 옐친 등 급진개혁파의 지도자들이 대부분 압승을 거두며 부상했다.

반면 보수파 지도자를 비롯한 고위 당 관료들은 대거 낙선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가시적인 효과를 내지 못하고 경제가 활력을 되찾지 못하는 가운데, 성급한 인민대중이 개혁파와 보수파에 등을 돌리면서 급진파에게 쏠리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권력 다툼은 이념의 간격을 극단적으로 벌려 놓았다. 개혁의 속도를 놓고 벌이던 다툼이 이제는 아예 사회주의 원리를 지킬 것인가, 자본주의로 전환할 것인가의 문제로 양분된 것이다. 양편 극단론의 사이에서 고르바초프의 입지는 날로 좁혀지고 있었다.

페레스트로이카에 또 다른 위기가 닥쳤다. 쿠즈바스, 돈바스 탄전지대에서 광업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고, 그루지야와 발트 연안 3개 공화국에서 탈연방 독립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게다가 소수민족들의 독립욕구까지 격한 양상으로 분출되고 있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는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대통령제 도입, 공산당의 권력독점 포기와 다당제 도입, 사적 소유권 인정'을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이에 따른 새 헌법 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옐친은 러시아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되어 사실상의 러시아 대통령이 됐고, 결과 급진파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등의 대도시 시정을 장악했다. 공산당은 이제 러시아 공화국에서는 야당이 됐다. 설상가상으로 옐친이 러시아 공화국 단독의 주권선언을 하면서 모스크바에 소련과 러시아의 이중권력 사태가 빚어졌다. 이것은 연방을 위기로 몰고 간 가장 결정적인 사태 변화였다.

리가초프가 은퇴하면서 보수파는 무력화됐고, 옐친 등의 급진파는 개혁 부진을 이유로 공산당에서 탈당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설계자들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급진파는 하루빨리 시장경제를 도입하라고 압박했다.

이에 개혁주도 세력도 급진파의 요구대로 시장 요소를 대폭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빈부격차, 경쟁의 독점화, 주기적 공황에 따른 대규모 실업, 범죄의 증가 등,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폐해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여론의 힘을 배경으로 몰아붙이는 급진파의 공격 앞에서 개혁파는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급진파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미국과 서독, 북유럽 일본 등을 선망했다. 그들은 자유시장 경제의 환상에 사로잡혔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폐해가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파멸적인 결과에는 점점 눈이 멀어져갔다. 개혁 개방으로 새롭게 부상한 기업인들, 글라스노스트로 사회적 위치가 급상승한 각종 전문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근거 없는 호감이 날로 확산되고 있었다.

옐친의 러시아 공화국은 고르바초프와 소련 최고회의를 무시하고 독자적인 개혁을 벌여나갔다. 덩달아 그루지아와 발트 3국 등의 분리독립운동도 갈수록 더 치열해졌다. 고르바초프는 각 공화국의 권력을 연방 권력보다 우위에 두는 신연방안을 제시했으나, 대부분의 공화국으로부터 거부당했다.

옐친을 비롯한 러시아 공화국 지도자들을 필두로 하여 친자본주의 세력으로 변한 급진파와 각 공화국의 분리독립주의자들은 소련과 고르바초프를 점점 허수아비로 만들어갔다. 아이러니 하게도 고르바초프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된 것이 바로 이 시점이었다.


3일천하 보수파 쿠데타와 옐친의 돌출 ⑯

혁명을 성공시킨 소련은 사회주의의 실현과 더불어 민족문제는 해결됐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해결된 게 아니라 숨어 있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고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민족문제는 폭발적인 양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1986년 카자흐 공화국 공산당 제1서기가 러시아인으로 교체되면서 일어난 폭동은 민족문제의 해소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알려주었다. 카자흐 인들의 주장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요구는 이민족인 러시아 인의 지배를 원치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발트 연안 3국에서는 ‘민족우선주의’를 표방하는 ‘인민전선’이 조직되었다. 1989년 7월 발트 3국은 사실상 독립을 의미하는 주권선언을 했다. 몇 달 후 리투아니아 공산당마저도 소련 공산당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민족 간 유혈투쟁으로 수백 명이 죽었다.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의 독립선언을 계기로 발트 3국은 1940년 병합의 무효를 선언하고 독립의 길로 달음질쳤다. 소련 중앙정부는 거의 100% 연방에 의지하고 있던 에너지 공급을 차단하며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의 독립운동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발트 3국은 2차대전 이전의 발트 위원회를 복원하고 소련에서 이탈했다. 이어 몰도바와 우즈베크 공화국의 주권선언이 있었다.

연방 구성 15개 공화국이 제각기 실질적인 국가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소비에트 연방은 해체를 시작했다. 고르바초프는 설득과 협박을 병행하면서 연방을 유지해야 페레스트로이카가 성공하고 모두가 잘살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미 가출을 결심한 공화국들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마침내 공화국들의 요구를 대폭 수용한 신연방안을 내놓았다. 새 연방조약안은 “각 공화국은 주권국가로서 자신의 영토 내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지며, 연방은 조약 가맹국이 위임하는 범위 내에서 권력을 집행한다”고 규정해, 연방보다 공화국의 권력이 우선함을 인정했다. 연방의 권한은 국방, 대외정책, 전략자원관리, 재정 · 통화정책으로 축소 조정되었다.

하지만 사태는 악화일로를 치달아갔다.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소련을 독재국가로 몰아가고 있다고 맹비난하면서, 마침내 고르바초프의 대통령 직 사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후 옐친을 지지하는 대규모 시위와 보수파의 맞불시위가 동시에 벌어지면서 소련의 정정은 더욱 불확실성이 짙어져 갔다.

1991년 8월 19일 이른 아침, 세계는 소련의 쿠데타 발생을 알리는 긴급뉴스를 접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와병으로 사임하고 전국에 6개월 간 비상사태가 선포됐다고 했다. 모스크바 시내에 전차와 장갑차가 진주했고, 국가 비상사태위원회가 전권을 장악했음을 알리는 담화문이 발표됐다.
8인 비상사태위원회 위원의 면면이 드러났다. 그들은 야나예프 부통령, 파블로프 총리,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의장, 크류츠코프 KGB(국가보안위원회) 의장, 야조프 국방장관, 푸고 내무장관, 스타로두부체프 농민연맹 위원장, 티지야코프 국가기업협의회 의장 등 체제유지를 적극 옹호하던 보수파 일색이었다.

이들은 전 날 크림 반도의 별장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비상사태선언 동조냐 사임이냐의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고르바초프는 별장에 감금됐고, 다음 날 쿠데타가 결행된 것이었다.

최고 권력을 눈앞에 둔 옐친은 누구보다도 기민하게 행동했다. 그는 쿠데타의 공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과감하게 러시아 공화국의 통제권을 자신이 전면 장악한다고 선언하고 불법 쿠데타에 대한 시민항쟁과 총파업을 촉구했다.

비상사태위원회는 옐친과 러시아 공화국 지도자들을 검거하려 했으나, 이들은 이미 러시아 공화국 의사당으로 피신해 있었고, 의사당 주변에는 옐친 지지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주요 도시들에서 대규모의 반 쿠데타 집회와 시위가 벌어졌다. 군대는 집회와 시위를 적극 봉쇄하지 않았고, 아예 일부 병사들은 시위에 호의적인 눈길을 보냈다.

그날 밤, KGB 특수부대에 러시아 공화국 의사당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의사당 앞의 시민들은 인간사슬을 만들어 탱크를 막았다. 시민과 군대의 충돌로 5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시민들이 굽히지 않자, 군대는 진압을 포기했다.

비상사태위원회 위원들 사이에 자중지란이 일어났다. 미국의 정보기관은 이들의 움직임을 낱낱이 탐지, 옐친에게 알려주었다. 옐친은 반 쿠데타 저항을 총지휘했다. 8월 21일 오후, 비상사태위원회 위원 7명이 모스크바 탈출을 기도하고, 푸고 내무장관이 자살하면서 쿠데타는 실패로 막을 내렸다. 소련의 보수 쿠데타는 이른바 ‘3일천하’로 끝난 실패작이었다.

쿠데타는 옐친을 영웅으로 탄생시켰다. 쿠데타 군의 탱크 위에서 연설하는 그의 모습은 러시아 인들의 뇌리에 새로운 지도자 상으로 각인되었다. 옐친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반면에, 쿠데타 주모자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민주적인 방법을 지키려 한 고르바초프의 인기는 급강하했다.

참담한 파멸을 맞은 것은 공산당이었다. 8월 23일 옐친은 러시아 공산당의 활동정지 명령을 내렸고,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직을 사임하고 당 중앙위원회에 자진 해산을 요청했다. 이에 소련 공산당은 해산했고, 당의 재산은 국가에 몰수됐으며, 저항하는 당원들은 체포됐다. 이제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은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동유럽 정권의 몰락과 단독 패권 미국의 횡포 ⑰

페레스트로이카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헝가리와 폴란드를 선두로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등 모든 동유럽 국가에서 국가사회주의를 개혁하여 민주적 사회주의로 나아가려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동유럽 국가들은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가 짧았다. 사회주의 체제 성립 과정에서도 소련의 지원을 받았고, 건설 과정에서도 소련의 것이 이식되었다. 결과 대부분의 국가에 스탈린 편향의 왜곡된 사회주의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요컨대 동유럽 국가들의 사회주의는 안정된 체제를 구축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사회주의 본연의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른바 ‘자주’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브레즈네프 독트린’(다른 국가의 사회주의 건설을 독려하고 지원)을 폐기한 고르바초프는 동유럽에 대한 불간섭 원칙을 천명했다. 그는 1989년 8월, 최고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하나의 완벽한 사회주의 모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 한 국가의 장래와 그 체제는 그 나라 국민만이 정할 수 있다. 어느 나라고 타국의 국내 상황에 간섭하거나 압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

폴란드에서는 연대노조를 근간으로 하는 비 공산계열 연립정부가 구성되었다. 헝가리에서도 ‘민주광장'이 정당으로 발전하여, 집권당인 헝가리 사회당의 개혁을 압박했다.

관료주의가 완강했던 동독에서는 서독을 향한 시민들의 집단탈출이 시작됐고 각 도시에서 민주화와 여행의 자유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개됐다. 위기에 처한 동독 정부가 여행의 자유화를 발표하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집권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부가 전원 사퇴했다.

이미 1968년에 자유화 운동이 일어났던 체코에서도 개혁 요구 시위가 잇따랐고 ‘시민광장’ 세력이 팽창한 가운데 급기야 공산당 정부가 붕괴되었다. 불가리아에서도 부패와 권력남용으로 지탄을 받던 공산당 지도부가 퇴진하고 개혁파로 전면 교체됐다.

1989년 동유럽 변화의 마지막은 루마니아가 장식했다. 끝까지 스탈린 식 관료주의 통치방식을 고수하며 개혁 요구 세력을 탄압해 온 차우세스쿠 정권이 대중봉기로 무너져버린 것이다. 차우세스쿠는 전격 처형됐고, 구국전선이 새 정부를 구성했다.

하지만, 동유럽 국가들은 원래의 목표였던 ‘민주주의의 확대’와 ‘민주적 사회주의’ 건설보다는 시장경제의 전면 도입, 사회주의의 폐기 방향으로 일주(逸走)했다. 1990년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합됐고, 다민족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유혈 낭자한 내전이 시작됐다. 대부분의 나라가 경제적 혼란과 정치적 불안 속에 휘말렸다.

소련이 대외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자 미국은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고 나섰다. 미국에 저항하는 나라들은 무자비하게 응징되었다. 미국은 리비아, 그레나다, 파나마에 무력을 행사했고 니카라과 정권을 정보전으로 와해시켰다.

1991년의 ‘걸프 전쟁’은 패권 미국의 횡포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아랍 민족주의로 미국에 맞선 이라크의 후세인은 세계평화를 훼절하는 현대판 마녀사냥의 제물이 되었다. 미국은 11개국의 다국적 ‘십자군’을 조직해 수백 만의 생명을 좌우지하는 ‘전자도박게임’을 벌였다. 그러나 전과 달리 소련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미국의 패권 시위는 경제 분야에서도 가속화됐다. 1986년 시작된 ‘우루과이 라운드’는 철저하게 미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기조 하에 진전됐다. 미국 권력자들에게 약소국들의 생명줄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처럼 단극화한 세계에서 미국의 횡포는 정치 경제 양면에서 거칠 것이 없었다.


소련 붕괴가 우리에게 주는 치명적인 교훈 ⑱

“그동안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 땅에서 생겨난 공산주의 모델은 실패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고르바초프)
“우리 땅에서 그런 실험이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 국민들에게 큰 비극이었습니다.” (옐친)

보수파의 쿠데타를 제압한 옐친은 고르바초프에게서 연방 권력을 하나하나 빼앗으며 자신의 권력을 확대해갔다. 이제 앉아 있다가는 연방이 아니라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될 상황에 놓였다고 판단한 다른 공화국들도 우크라이나를 시작으로 차례로 독립을 결의했다.

이미 발트 3국의 독립을 승인해 준 고르바초프는 소련 대통령 직을 사임하고 크렘린을 떠났다. 크렘린의 국기 게양대에서 소련의 적기가 내려지고 러시아 삼색기가 펄럭이게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했던 15개 공화국은 모두 독립국가가 됐고, 그중 11개국이 북부 유라시아에 독립국가공동체(CIS)를 구성했다. 이로써 소련은 74년 만에 와해되었고, 옛 소련 사람들은 사회주의 체제의 보호막에서 나와 자본주의 생존경쟁의 길로 들어섰다.

전체 인민의 소유였던 국가의 부가 이익과 욕망에 민첩한 개인들에게 넘어가면서 졸부들이 출현하고 빈부격차가 심해졌다. 페레스토로이카에서 10년쯤 지난 2000년대 들어 시장이 조금씩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체제가 갑작스럽게 자유주의 체제로 전환되긴 했으나, 일찍이 이를 경험한 적이 없는 러시아인들은 한동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오늘날 러시아는 2000년 이후 ‘위대한 러시아’의 재건을 추구하는 푸틴 체제 하에서 안정을 되찾고 있다. 소련 해체 후 옛 소련의 지위는 독립국가공동체의 중심인 러시아가 계승했다. UN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을 비롯한 국제적 지위도 러시아가 모두 이어받았다.

옐친은 경제가 어려워지고 민족 갈등이 첨예화되는 가운데 반대파의 결속이 강화되면서 지지도가 추락했다. 위기에 몰린 옐친은 초헌법적인 비상조치를 취했다.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실시해 양원제 새 의회를 구성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의원들이 이에 항거하여 의사당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군대가 의회를 포위한 가운데, 반 옐친 시위가 벌어져 62명이 사망했다. 옐친은 모스크바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마침내 군대가 의회를 유혈 점령하고 이 과정에서 다시 50여 명이 죽었으며 반정부 지도자들은 체포됐다. 일찍이 1991년 8월 진압군의 탱크 위에서 쿠데타를 저지한 옐친이 불과 2년 후 이제 탱크를 앞세우고 반대자들을 유혈 진압한 것이다.

1993년 새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됐다. 옐친과 급진개혁파는 새 선거에서도 안정 다수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옐친의 급진개혁을 지지하는 '러시아의 선택'은 15%를 득표하는 데 그쳤고, 다소 온건한 개혁을 표방하는 3개 정파가 20%를 약간 밑도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따라서 옐친 정부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정파의 득표율은 많게 잡아도 35%가 채 안 되었다.

1995년을 전후하여, 자본주의로 전환된 경제가 마침내 성장 추세로 돌아서긴 했으나 그 기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97년 말의 동아시아 경제위기가 러시아의 취약한 경제를 타격하면서, 러시아는 1988년 모라토리움(채무 불이행)을 선언했다.

경제 위기에 따른 국민들의 불만이 쌓이면서 정치적 위기에 몰린 옐친은 건강까지 악화되어 1999년 말 임기를 조금 남겨둔 시점에서 전 KGB 출신의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고 사임했다. 체첸 반란을 강경 진압하여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푸틴은 200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공산당과 자유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푸틴은 2000년 ~ 2008년 대통령 두 번, 2008년 ~ 2012년 총리, 2012년부터 6년 임기의 대통령을 하면서 16년 넘게 정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처럼 21세기의 러시아는 ‘푸틴의 러시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푸틴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러시아를 무난히 이끌어가고 있다.

러시아 인들은 옛 소련과 표트르 치세 러시아의 혼합형을 위대한 러시아의 전형으로 인식하고 있다. 푸틴은 국가주의와 중도 성향의 정당들을 폭넓게 합친 ‘통합 러시아당’을 만들어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러시아는 소련 해체 후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차츰 급격한 변혁이 초래한 질곡에서 벗어나고 있다.

다른 소련 공화국들의 사정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그토록 바라던 독립과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것은 경제적 침체와 빈부격차, 대량실업, 위축된 자존심뿐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알지만 관료주의와 제국주의로 왜곡된 사회주의에는 향수가 없다.

소비에트 연방 해체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실로 적지 않다. 서둘러 통합하면 해체도 빨리 온다는 사실, 이념은 짧지만 민족은 길다는 사실, 좋은 것(사회주의)이 왜곡되면 보통 것보다 나빠진다는 사실, 한 번 환상을 품으면 반대되는 환상을 다시 품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역사와 경험을 무시하고 타인의 것을 부러워하여 추구하는 국민은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된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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