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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홈 > 김갑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100권의 책 28
우리는 미소냉전의 와중에 휩쓸린 유일 분단국
김갑수 | 2017-12-12 13:50:1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이단아 스트라빈스키와 인민의 아들 막심 고리키 ⑦

“그들이 보기에 이것은 예술로서의 음악을 파괴하려는 불경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들은 휘파람을 불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이게 무슨 음악이냐, 의사를 불러와라, 발레는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외쳐댔다. 이에 반해 음악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난동자들에게 반발하여 맞고함을 질러댔다. 아무튼 그것은 저녁의 휴식을 위한 예술에 대한 반란이었다.”

스트라빈스키(1882~1971)의 <봄의 제전>이 첫선을 보인 것은 1913년 5월 파리의 상젤리제 극장에서였다. 청중의 대부분은 아름다운 음악과 우아한 발레를 기대하고 온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기대했던 음악과 발레는 19세기까지의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20세기에 새로이 출현한 음악이 귀에 거슬렸던 것이다. 마침내 객석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모르는 것에 대한 야유는 예나 지금이나 ‘모르는 자’들이 곧잘 행사하는 특권(?)인 것 같다.

불협화음의 음악과, 봄의 부활을 환영하기 위해 이교도 농민들이 처녀를 제물로 바친다는 야만적인 줄거리.....당시 세련을 자부하던 파리시민은 함성과 야유의 보냈고 결국 본격적으로 주먹다짐이 벌어졌다. 소동 속에서 음악은 묻혔으며 스트라빈스키는 극장에서 도망쳤고, 공연은 혼란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봄의 제전>이 인정을 받는 데는 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다음 해에는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으며 짧은 시간에 고전의 반열에 올라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유럽 세계에 충격파를 선사한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에게는 ‘현대음악의 창시자 중 하나’라는 평가가 매겨졌다.

당연히 그의 초기 작품들에는 불안한 시대의 공기와 긴박한 혁명 전야의 공기가 배어 있다. 혁명 전야의 러시아 문화는 부르주아 사회와 인민의 사회로 갈라져 있었다. 이 둘은 각각 형식주의를 강조하는 모더니즘과 인민의 정서를 고양하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런 대비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분야는 음악보다는 문학이었다.

막심 고리키(1868~1936), 오늘날 그는 ‘인민의 아들’ 또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기림을 받는다. 그는 혁명에 직접 가담하여 고초를 겪었고, 줄곧 러시아 사회의 부조리를 사납게 공격하면서 인민의 삶을 옹호했다. 그는 인민으로 하여금 문학을 소유하게 만든 작가였다.

그의 대표작에는 <밑바닥에서>와 <어머니>가 꼽힌다. 두 작품 모두 부르주아 사회 저변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격렬한 사회고발의 어조로 말한 문학이다. 특히 <어머니>는 혁명적 노동자를 등장시켜 노동운동의 발전 양상을 생동감 있게 묘사함으로써, 아직까지도 노동운동의 주요한 참고 저작물로 우대되고 있다.

“러시아의 민중은 자신들의 삶, 억압 받고 학대당하고 추방당하는 삶을 인류 전체에게로 알리기 위해 ‘자신들의 살’로 고리키의 ‘입’을 만들었다.”(오스트리아 익명의 노동자 작가의 말) 이것은 러시아 민중과 작가 고리키의 관계를 비유한 말이다. 러시아 민중과 작가 고리키는 ‘살과 입의 관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리키는 노동자의 살을 입으로 말해주는 작가였으니 그는 명실 공히 ‘노동운동작가’였다.


4월 테제, 볼셰비키와 레닌의 등장 ⑧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퇴위를 결정하는 동안에는 차분했지만 일기장에는, “러시아를 위해, 전장의 군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이 조치를 내리기로 결정하였다......나는 내 주위의 모든 반역과 비겁과 기만을 보았다.”라고 썼다.

차르를 타도한 러시아는 왜 레닌을 필요로 했던가? 혁명대가 승리하고 차르가 물러났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원래 진짜 혁명은 혁명의 대상이 타도된 시점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자본가와 자유주의자들의 임시정부 하에서는 되는 일도 없었고 안 되는 일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없었다. 그들 생각에, 전쟁은 계속돼야 했다. 그러나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민중일 뿐 다수의 자본가는 오히려 이득을 보고 있었다. 연합국의 제국주의자들도 임시정부를 지지하면서 전쟁 계속 수행을 종용했다.

임시정부는 대중에게 빵도 줄 수 없었다. 지금 상태에서 대중들에게 빵을 준다는 것은 곧 자기들의 이윤감소를 의미했다. 토지도 물론 줄 수 없었다. 농민에게 토지를 준다는 것은 권력 지주의 파산, 나아가 자본주의적 소유의 파괴를 뜻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토지는 은행에 저당 잡혀 있었다.

자유도 줄 수 없었다. 전제가 타도되고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 마당에 대중들에게 더 이상의 자유와 권리를 주면 자기들의 권력이 유지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소비에트를 무력화시켜 임시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또한 임시정부는 소수민족 억압정책을 고수했다.

대중들의 열망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민중의 권력기관인 소비에트뿐이었다. 그러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주축을 이룬 소비에트의 지도부는 자신의 임무를 저버리고 임시정부의 정책을 사실상 지지했다.

그러나 인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전국 각지에 노동자와 병사와 농민의 소비에트가 만들어졌다. 소비에트와 별개로, 병사들은 부대마다 군위원회를,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을, 농민들은 농민위원회를 만들었다. 병사들과 민중들 사이에 반전기운이 더욱 높아갔고, 노동자와 농민들은 공장과 토지의 접수를 시작했다.

3개 사회주의 정당 중 당시 가장 소수였던 볼셰비키만이 이 흐름을 읽었다. 그들은 임시정부와의 협력에 반대하고, 전쟁반대와 즉각 평화 실현, 혁명의 계속 수행을 외쳤다.

레닌은 4월 3일 저녁 페테르부르크에 도착, 볼셰비키와 러시아 인민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진짜 혁명은 레닌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는 대중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핀란드역 광장의 장갑차에 올라 열변을 토했다.

“사랑하는 동지, 병사, 노동자 여러분! 러시아 혁명을 승리로 이끈 여러분을 보니 기쁩니다. 여러분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전위입니다. 강도들의 제국주의 전쟁은 전 유럽 내전의 시작입니다. 머지않아 유럽 자본주의는 깡그리 무너질 것입니다. 러시아 혁명은 그 시작입니다. 전 세계의 사회주의 혁명 만세!”

레닌의 외침은 ‘부르주아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 만세였다. 다음 말 레닌은 볼셰비키 집회와 사회민주당 연합집회에서 연이어 ‘당면 혁명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를 발표했다. 이것이 이른바 ‘4월 테제’라는 것이었다.

1. 계속되고 있는 제국주의 전쟁에 단호히 반대하고 즉각 평화를 실현해야 한다.
2.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을 넘긴 혁명 1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이 권력을 장악하는 혁명 2단계로 이행해가야 한다.
3. 임시정부를 지지해서는 안 된다.
4. 소비에트의 권력을 확대해야 한다.
5. 의회제 공화국에 반대하고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
6.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해야 한다.
7. 모든 은행을 소비에트의 통제를 받는 국립은행으로 통합해야 한다.
8. 생산과 분배를 소비에트가 통제해야 한다.
9. 당 대회를 소집하여 강령을 바꾸고 당명을 공산당으로 바꿔야 한다.
10. 새로운 국제혁명조직으로 제3인터내셔널을 창설해야 한다.

요컨대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시켜 부르주아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시켜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4월 테제’는 러시아 사회를 흔들어 놓았다. 그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분명하게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전화를 외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는 레닌을 독일의 첩자라고 중상 모략했고, 멘셰비키는 레닌이 ‘반동에 봉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레닌은 3주 동안 당원들을 이해시켰다. 마침내 4월 말, 볼셰비키 협의회는 레닌의 '4월 테제'를 공식입장으로 채택했다. 이후 사태는 레닌이 옳았음을 입증해주었다. 러시아 민중들의 움직임은 자유주의 정치인이나 타협주의 진보 지식인들의 의식을 앞지르고 있었고, 레닌에게는 그 추세를 읽어낸 날카로운 통찰력이 있었던 것이다.


레닌, “스탈린은 안 된다” ⑨

레닌의 서거와 스탈린 사회주의의 이중성

“스탈린을 그 지위에서 해임하고, 다른 모든 점에서 그보다 못하더라도, 더 참을성 있고 신실하며, 동지들에게 친절하고 그만큼 흥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보다 뛰어난 인물을 그 자리에 임명하는 방법을 고려해보자. 이것은 사소한 문제로 보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사소한 문제일지도 모른다.”(사후 공개된 레닌의 편지 중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혁혁한 지도자 레닌이 서거한 것은 1924년 1월 21일이었다. 망명생활과 혁명투쟁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에 몸을 혹사한데다 1918년 사회혁명당 테러리스트에게 당한 총격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이미 세 차례나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지만 그의 이른 죽음은 러시아는 물론 전 세계 약소민족들에게도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레닌은 1922년 12월 병상에서 여러 편의 논문과 편지들을 구술하여 사회주의 소련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혁명의 진전과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불꽃처럼 쏟아낸 것이다.

흔히 레닌의 ‘정치 유언’이라고 불리는 ‘당 대회에 보낸 편지’가 있다. 편지에서 그는 당 지도자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그들의 장단점을 지적했다. 레닌은 또한 당의 단결과 중앙위원회의 확대 강화 등을 제안했다. 이 편지는 레닌이 죽은 후 중앙위원회에서 낭독되어 큰 파장을 일으킨다.

레닌은 트로츠키에 대하여, 그의 ‘비 볼셰비즘’을 지적하고 ‘멘셰비즘’ 재발 위험을 경고하면서, “당 중앙위원 중에서 가장 유능하나 자신과잉에 빠져 있고 사업을 순행정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레닌은 스탈린에 대해서는, 당의 뛰어난 활동가임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결정적인 결격사유를 지적했다. 레닌은 말하기를, “스탈린이 서기장이 되어 무한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 그 권력을 신중하게 행사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이 글 앞에서 보았듯이 레닌은 스탈린이 차기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1923년 4월에 열린 당 대회에서부터 이미 레닌의 우려는 곧 현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당 지도자들은 레닌이 해 놓은 인물 평가를 그대로 노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레닌이 편지에서 말한 핵심은 대중과 더 긴밀하게 결합하기 위해 당이 변화를 보이면서도 당이 단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회에서는 오히려 당의 권한이 강화되었고 ‘당의 단합’을 명목으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배척되었다.

트로츠키는 1923년 10월 중앙위원회로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그는 당의 경제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한 후 ‘서기국 관료주의’를 ‘당내 민주주의’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트로츠키 지지자 ‘46인의 성명’이 뒤따랐다.

당 중앙위는 이에 맞서 곧 분파행동을 비난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1924년 1월 레닌이 죽기 며칠 전, 트로츠키가 요양 차 카프카스로 떠난 뒤 열린 당 협의회는 트로츠키를 맹공격하고 그들 일파를 탄핵했다. 결과 요양지에서 레닌의 죽음을 맞은 트로츠키는 레닌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레닌이 죽은 후 노동자들이 대거 공산당에 가입했다. 레닌에 대한 추모 열기 적분에 2년 사이에 당원이 35만에서 60만으로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당 기구를 관장하는 서기국의 권한이 강화되고 서기장 스탈린에게 권력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자기 스스로 레닌 이후의 지도자임을 공공연히 자처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트로츠키는 날카로운 필봉으로 이에 저항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직접 공격하지 않는 대신 다른 사람을 통해 그를 공격하도록 만들었다. 이른바 이이제이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트로츠키 공격의 선봉에 나선 것은 스탈린이 아니라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였다. 1927년 이후 스탈린은 유일한 최고지도자로 부상한다. 1927년 12월 27일 제15차 당대회는 ‘당의 일반노선으로부터의 이탈’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스탈린의 권위를 굳혀주었다.

아주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트로츠키는 국제사회주의자였고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자였다. 하지만 이것은 노선의 차이라기보다는 권력 투쟁의 결과 나타난 현상이었을 따름이다. 스탈린은 레닌을 계승하겠다고 하고 권력을 장악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는 레닌의 계승자가 아니라 레닌의 훼손자 또는 레닌의 배반자 같은 길을 걸었다.

스탈린은 레닌과 확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자에 앞서 제국주의자였으며 정도(正道)가 아닌 사도(邪道)를 추구한 마키아벨리스트였다. 그는 미국에 지나치게 겁을 집어먹고 있었고 중국 마오쩌둥이 사회주의 세계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경멸적으로 질투했다. 그는 보이지 않게 미국에 협조하여 조선과 중국의 민족 분단 정책을 지지했다.

이후 소련에서 스탈린의 한계를 극복하는 지도자가 나오지도 않았다. 사회주의의 정도를 상실한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는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는 기실은 사회주의의 얼굴로 제국주의와 패권주의를 음험하게 추구한 가짜 사회주의의 해체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소련의 해체와 동구권 위성국들의 정권 몰락을 사회주의의 패배, 자본주의의 승리로 보는 역사관에는 성급한 오류가 있다. 오늘날 소련은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사회주의는 중국, 조선, 베트남, 쿠바, 이란 등지에서 그 나름 전통성과 조화를 이루면서 대책 없이 타락한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서 그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반파쇼전쟁 승리의 주역 소련, 그러나 아시아는…⑩

2차세계대전에서 반파쇼전쟁을 주도한 나라는 단연 소련이었다. 전쟁 초기 미영불 등은 히틀러의 파쇼 독일과 사회주의 혁명국 소련 사이에서 눈치보기에 급급했다. 그들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독일과의 화해정책을 펼쳤다가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과 동맹국들은 무려 190개 사단을 동원하여 일제히 소련의 서부 국경을 침공했다. 이로부터 6개월 만에 소련 영토의 절반이 독일군에게 잠식되었고 레닌그라드(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까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러시아 인 특유의 민족정신이 되살아났다. 그들은 앞 다투어 전선 출정을 지원했다. 러시아 인들은 19세기 초 나폴레옹 군과 벌인 전쟁을 조국전쟁이라고 했는데, 2차대전 히틀러의 독일과의 전쟁을 한 격 높여서 ‘대조국전쟁’이라고 불렀다.

소련이 초전에서 독일에 참패한 데에는 스탈린의 오판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소-독 불가침조약만을 지나치게 믿고 있다가 당한 것이다. 그는 독일군이 러시아 도시를 폭격하기 시작했는데도 가급적이면 독일군과 직접 충돌을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련의 연대 제의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던 영불 등 유럽 국가들은 히틀러 군에게 호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반파쇼전쟁에 합류하게 된다. 사실 그들은 반파쇼전쟁에서 뒤늦게 숟가락 하나 얹은 것에 불과했다. 시종일관 반파쇼 전쟁을 주도한 것은 소련이었고, 그만큼 소련은 희생과 공로 양면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한편 대서양 너머에서 세계대전의 특수를 누리면서 관망만 하고 있던 미국은 1941년 말 파쇼 추축국 일본에게 진주만을 기습당하게 되자 부랴부랴 영국과 함께 소련 편에 가담했다. 하지만 그들은 유럽 전선에 전력투구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소련이 기력을 회복하여 잃었던 영토의 거의 전부를 회복해 갈 무렵인 1944년 6월이 되어서야 미영 연합군이 도버해협을 건너 노르망디에 상륙한다.

그들은 오늘날까지 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독일군에게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과장선전하고 있으며 독일을 항복시킨 것은 거의 전적으로 미영 연합군인 양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 국경을 넘어 베를린을 압박해 들어간 것은 소련군이었다. 1945년 5월 2일 소련의 적기가 독일 국회의사당에 꽂혔고 히틀러는 자살했으며 독일은 무조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4년 간의 소-독 전쟁은 소련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소련은 세계 지배를 꿈꾸던 히틀러의 야망을 꺾고 파쇼 책동을 잠재운 제1 주역이었다. 소련과 소련 인민은 반파쇼 전쟁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웅적인 투쟁을 벌인 것이다.

2차대전 후 제1 전승국 소련의 국제적 위상은 당연히 높아졌다. 유럽전선에서의 스탈린은 거침없고 당당했다. 그러나 소련의 태도는 아시아에서는 달랐다. 그들은 1945년 8월 8일이 되어서야 중국 동북전선에서 대일본 전에 본격 참전하는 늑장을 부렸다.

스탈린은 중국전선에서는 벌써부터 중국의 마오쩌둥을 견제하여 미국이 지원하는 장제스 편에 양다리를 걸치는 보험 투자를 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미국의 원자폭탄 위력 앞에서 겁을 먹은 나머지 미국의 요구를 거의 들어주었다.

스탈린은 패전국 일본을 분할하는 대신 애꿎은 조선을 희생시키려는 미국의 조선 분단 제안에 선뜻 동의했으며, 심지어 중국 국공내전에서도 중국의 양자강 선 분단을 지지하기도 했다. 조선은 미-소 협잡으로 인해 남북이 분단되었지만 마오는 이런 미-소의 야합적인 기도를 인민의 힘으로 분쇄하여 마침내 1949년 10월 통일 중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미소냉전의 와중에 휩쓸린 유일 분단국 ⑪

영국, 미국의 푸들이 되다

1947년 미국의 정치학자 W.리프먼은 ‘냉전 The Cold War’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보다 한 해 전인 1946년 3월, 처칠은 미국 웨스트민스터 대학 연설에서 유럽대륙에 ‘철의 장막’이 생겼다고 경고하면서 미국과 영국이 단결하여 소련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 연설이 사전에 미국과 짜고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정작 소련을 ‘철의 장막’으로 내몰면서 냉전을 주도한 것은 영국이 아닌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 6월 25일,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은 언론 인터뷰에서 자유시장과 자유경제를 옹호하며, “선택의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라고 잘라 말했다. 이 발언은 신자유주의만이 진리라는 입장을 표명한 발언으로 곧잘 인용된다.

나는 대처의 이 발언 역시 사전에 미국과 짜고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다음 해인 1981년 들어 미국 대통령 레이건은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몰이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영국은 미국의 ‘주구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연합국의 지도자였던 처칠의 발언은 이제 막 전쟁에서 벗어난 세계의 인민들에게 적이 실망을 안겨주었다. 특히 소련의 스탈린은 처칠을 히틀러에 비유하면서 전쟁광이라고 비난했다. 미국과 교감하던 처칠은 2차대전 종반부터 소련의 영향력 증대를 경계했다. 독일을 무너뜨리는 데는 소련과 연합하여 함께 싸웠으나, 소련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은 미국과 영국이 하등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동유럽 인민들은 소련군을 해방자로 환영했다. 동유럽 각국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사회주의 체제로 발전해갔다. 아시아에서도 조선과 베트남이 같은 길을 걸었고, 중국에서도 혁명이 성공하고 있었다. 이른바 사회주의의 세계 체제가 구축되고 있었던 것이다.

처칠은 영국보다 오히려 미국에서 많은 동조자를 얻었다. 이어서 1947년 마셜 미 국무장관이 유럽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마셜 플랜'을 발표했다. 곧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경제 부흥회의가 열렸고, 유럽 16개국으로 구성된 기구가 구성되었다.

미국을 기축으로 하여 서유럽 국가들이 반공정책을 노골화하자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도 이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런 노력은 ‘몰로토프 플랜', ’코민포름(공산당 정보국)‘, ’코메콘‘ 등으로 연이어 표면화되었다.

미소간의 양극 체제 대결은 갈수록 첨예해졌다. 이 냉전은 소련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미국과 영국이 조장한 면이 다분했다. 동서냉전 상태는 군사적인 대결체제로까지 치달았다.

1949년 4월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를 결성했고, 1955년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해 대응했다. 1949년에 소련은 미국에 이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1950년에는 한국에서 6.25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은 내전이자 냉전의 산물이었다. 아무튼 이 전쟁은 냉전이 열전으로 비화한 것이었다. 베트남의 대 제국주의 투쟁도 냉전 속의 열전으로 비화되었다.

한편 동서냉전의 두 주체인 미국과 소련에서는 반대자를 적으로 몰아쳐 탄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미국에서는 1948년 ‘히스 사건’으로 공산주의자 색출 공정이 시작되었다. 히스는 국무부의 고위 관리로 오랫동안 근무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국가 기밀을 소련에 넘겨준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을 살았다.

1950년에는 미 연방 수사국(FBI)이 미국인 간첩들이 1945년과 1946년에 원자 폭탄 관련 자료를 소련에 넘겨주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기소되었는데, 이 중 줄리어스 로젠버그 부부는 1953년에 사형 당했다. 또한 1950년부터 5년 동안 상원의원 매카시에 의해 도발된 ‘매카시즘’ 광풍이 미 전역을 휩쓸었다. 이로 인해 관료 · 정치가 · 교수 · 문인 · 예술가들이 대거 희생당했다.

소련에서도 ‘스탈린주의’와 ‘개인숭배’가 나타났고, 문화와 예술의 이데올로기 통제가 시작됐다. 레닌그라드 사건, 의사단 음모사건 등의 반체제 사건이 발생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1948년 독자노선을 추구하던 유고슬라비아가 코민포름에서 제명되었다.

동서냉전의 대표적인 산물은 3개의 분단국이었다. 베트남은 1975년 월맹이 승리하여 자주독립국이 되었다. 독일은 1990년 서독의 주도로 통일을 이루었다. 우리만 냉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치욕의 분단 역사가 지속되고 있다.

쿠바 미사일 핵전 위기와 미-소 타협 ⑫
“흐루쇼프 동지, 당신은 스탈린 때 뭐하고 있었습니까?”

스탈린 치하에서 전쟁(2,700만)과 학살(1,100만) 등으로 인하여 소련 인구의 5분의 1이 죽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556년 2월 소련의 새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가 제 20차 당 대회에서 유명한 연설 ‘스탈린 시대의 범죄에 관해’를 거의 끝내가고 있을 때였다. 강연장 말석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흐루쇼프 동지, 스탈린이 그 모든 범죄를 저지르고 있을 때 고급 당 관리인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흐루쇼프는 연설을 중단하고 1,500명의 열성당원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지금 말한 사람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강연장에는 침묵이 흘렀다. 흐루쇼프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연단에 놓았다.

“정확히 1분의 시간을 주겠습니다.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시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은 가운데 1분이 지나갔다. 그러자 흐루쇼프는 시계를 호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내가 기꺼이 대답하겠습니다. 스탈린이 모든 범죄를 저지르고 있을 때 나는 방금 전 질문을 한 동지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미국이 원폭을 개발하자 4년 뒤인 1949년 소련도 원폭을 개발했다. 미국이 수소폭탄을 만든 것은 1952년인데 바로 1년 뒤인 소련도 수소폭탄을 만들었다. 이처럼 핵을 포함한 무력 경쟁은 미국이 앞서나가고 소련이 곧바로 추격하는 형세로 이루어졌다.

이와 별도로 소련은 고성능 미사일 개발을 추진하여 1955년 IRBM(중거리 탄도탄)과 1957년 ICBM(대륙간 탄도탄)의 개발에 연속으로 성공하여 미사일 경쟁에서 미국을 앞서게 된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SLBM(잠수함 발사 미사일)을 개발하여 미사일 판세를 역전시켰다. 참고로 오늘날 조선은 IRBM, ICBM, SLBM 셋을 다 보유하고 있다.

흐루쇼프의 평화공존론은 일단 핵전쟁이 일어나면 승패의 의미가 없이 모든 인류가 공멸한다는 위기 상황을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대조국전쟁에서 엄청난 피해를 겪은 나머지 이제는 누구보다 평화를 갈망하게 된 소련인들에게 그의 평화공존 주장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흐루쇼프는 직접 미국을 방문하여 군축을 제안하는 등 다각도로 평화공존 외교를 펴나갔다. 그러나 1960년 5월 미국 첩보기 U-2기의 소련 영공침입 격추사건이 일어나면서 그의 평화공존 노선은 난관에 부닥쳤다. 이는 역시 미국은 평화공존만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한 사건이었다.

미- 소간 긴장이 높아진 가운데 1961년 8월 동서 베를린을 가르는 장벽이 설치되었다. 이어서 군비확대경쟁이 재개됐고, 일시 중단되었던 양국의 핵실험도 대규모로 감행되었다.

소련 공산당 내부에서 흐루쇼프가 미국과의 대결에서 번번이 밀린다는 불만이 표출되었다. 이러던 중 1962년 가을 갑자기 쿠바의 카리브 해에서 미소 간 무력대결이 표면화되었다. 소련이 쿠바에 건설 중인 미사일기지가 미국 항공 첩보기의 항공사진에 포착된 것이다. 또한 쿠바는 1962년 9월 소련제 IRBM 42기를 배치한다는 무기원조협정을 체결한 사실이 드러났다.

쿠바는 미국의 옆구리를 겨누는 ‘붉은 칼’과 같은 존재였다. 1961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반혁명군의 ‘피그(돼지) 만 침입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후, 미국은 마치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식으로 대 쿠바 수출금지, 미주기구에서의 쿠바 제명 등, 쿠바 압박 작전을 전개했다. 쿠바는 미국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구책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소련의 전략 핵 미사일을 들여오고자 했다.

한편 소련의 흐루쇼프는 쿠바에 전략무기의 선제 배치를 통해 미국과의 군비교섭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미 대통령 케네디는 예상과 달리 강경책을 구사했다.

그는 즉각 국가안전보장위원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전국 TV 방송을 통해 이 사실을 알리면서 “해상봉쇄로 쿠바를 격리시켜 소련 미사일의 반입을 막고, 쿠바의 핵미사일이 서방국가를 공격할 경우 이를 소련의 미국 공격으로 간주하여 소련에 상응하는 핵 보복 조치를 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것은 핵전쟁의 공포가 현실화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미국은 183척의 함정과 1,190대의 전투기를 동원하여 2,400㎞의 카리브 해를 봉쇄한 채 미사일을 실은 소련 선단의 도착을 기다렸다. 미국은 소련 선박이 정지명령에 불응할 경우 격침시킬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바야흐로 세계의 이목이 카리브 해에 집중되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의 초강경책에 한발 물러났다. 대신 그는 쿠바를 절대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에 부응하여 미국이 쿠바 불가침을 약속하자 소련은 쿠바에 건설 중인 미사일 기지를 파괴하고 미사일 배치 계획을 철회했다.

소련에서는 군부를 중심으로 흐루쇼프의 소극적인 대응에 대한 비난이 일면서 그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하지만, 쿠바 타협을 계기로 소련과 미국 관계는 호전되었다. 반면 소련과 중국 사이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미 소련을 제국주의 세력과 타협한 ‘수정주의’로 규정한 바 있는 중국은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한 것은 모험주의이며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것은 ‘투항주의’라고 비난했다. 소련은 중국에 대해 ‘교조주의’라고 맞비난했다. 이제 사회주의권에서도 소련과 중국의 양극화 현상이 일어날 조짐이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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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카니발콥  2017년12월12일 19시28분    
내용이 넘 길어서 읽기 힘들어
좀 줄여라
(81)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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