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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꿀 수 있는 100권의 책 42
혁명 음악가 정율성의 삶과 조선의용군
김갑수 | 2018-01-08 15:11:0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정율성은 1918년 전남 광주에서 정해업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정해업은 광주 수피아여고 교직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민족정신이 투철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아들 넷과 딸 하나를 항일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내보냈다.

정율성의 부친 정해업은, 일찍 한학을 배웠고 사서오경을 통독하였을 뿐 아니라 서법에도 능했으며 강직하고도 민족적 절개가 있는 사람이었다. 정해업이 온종일 만돌린을 켜면서 노래만 부르던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는 기록이 있다.

▲음악가 정율성

..... 아버지는 책망조로, “음악도 쉬엄쉬엄 해야지 나라를 빼앗긴 신세에 어찌 밤낮 노래만 부르겠느냐? 그래도 공부를 더 많이 해야지, 이렇게 세월만 보내면 장차 어찌하겠느냐?”라고 하시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부은아, 만돌린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고 네가 너무 지나칠까봐 그런 거지. 외적과의 싸움에서도 최후의 결전에는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승전고를 울린단다. 군대가 진군할 때 사기를 돋우는 데는 우렁찬 군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군가가 없거든.....”(《정율성 평전》)

이처럼 정율성의 아버지 정해업의 말에는 나라를 잃은 지식인의 탄식이 배어 있으며 나아가 외적과의 싸움에서 승전고를 울리며 우렁찬 군가를 부르고 싶어 하는 항일전 승리의 원망(願望)이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마지막 말 ‘우리에게는 이런 군가가 없거든’에서는 자주적 정신이 읽힌다. 또한 ‘군가가 없다’는 말은 예언적이었다. 정율성은 훗날 중국과 조선 두 나라의 군가롤 동시 작곡하는 음악가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되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정율성의 삶에 결정적인 전기(轉機)가 된 중국 출정이 어떠한 윤리적 성격을 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율성의 중국 출정은 자주정신과 민족주의의 발로였다고 해석되며 이것은 조선의 전통적인 선비윤리가 구체화된 것이다. 물론 선비정신이 조선만의 유일, 고유한 윤리였다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유학문화권인 중국이나 베트남에서도 유사하게 계승되어 나타났다. 중국의 모택동이나 베트남의 호치민 같은 지도자가 제국주의 침략을 격퇴하고 통일혁명을 성취한 데에는 자주정신과 민족주의가 핵심적 이념으로 적용되었다. 이런 점에서 정율성의 항일 출정은 조선적인 선비윤리이자 동양적인 선비윤리의 발현이었다고 확대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의열단·조선혁명간부학교와 사회주의]

2014년 7월 한국을 방문한 중국 시진핑 주석은 서울대학교 특강에서 중국과 한국 두 나라의 우의를 다진 전통적 인물들을 열거했다. 진(秦)나라의 외교관 서복(徐福)과 신라의 학자 최치원으로 시작된 이 ‘소략 인물전’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노량해전에서 함께 전사한 명나라의 수군 장군 등자룡(鄧子龍)을 거쳐 음악가 정율성에서 끝을 맺었다. 이것은 그만큼 한중관계가 유구한 전통을 가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오늘까지 면면히 계승되어 왔음을 강조하는 언명이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대륙으로 대거 출정한 것은 1910년 일한강제합병으로 영토가 완전히 점령되어 더 이상의 항쟁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보다는 새로운 전선이 만들어진 중국 땅으로 가서 일본군과 정면으로 승부하겠다는 적극적인 회심(會心)도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인들은 앞에 언급된 시진핑의 강연처럼 한중 우호적, 한중 공동체적 인식으로 조선인들을 수용했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보다는 일본 제국주의의 난동적인 침략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공동대처라는 현실적인 필요성을 절감했던 이유가 더 컸다. 결과 중국 대륙 도처에서 한중연합전선이 형성될 수가 있었다. 한편 일제는 1931년 9월 18일 중국 동북(만주)에 전면적인 침략전쟁을 도발했다.

정율성이 중국으로 출발한 것은 1933년 5월 8일이었다. 목포에서 배를 탄 정율성은 부산과 일본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5일 후인 1933년 5월 13일 상해 푸동 항에 도착했다. 정율성은 이전 시대의 선배들처럼 무작정 대륙 행을 감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중국 출정은 미리 중국에 가서 항일사업에 참여하고 있던 그의 셋째 형 정의은이 남경 소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이하 간부학교) 2기생 모집의 임무를 띠고 광주에 나타났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간부학교는 의열단이 설립한 항일교육기관이었다. 따라서 정율성의 향후 수년의 행로는 예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간부학교 입교는 정율성에게 새로운 사회윤리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것은 정율성이 수료한 간부학교 2기의 교육과목을 통해 추리된다.

철학, 유물사관, 변증법, 경제학, 정보학, 중국혁명사, 삼민주의, 사회과학, 의열단사, 조선정세, 세계정세, 조선운동, 각국혁명사, 당조직문제

정율성은 이런 교육과목 외에도 군사학과 군사훈련을 이수했다. 10대 후반의 나이에 합숙하면서 밤낮 없이 정진, 수학했음을 감안할 때 비록 8개월의 기간이기는 하지만 이런 교육은 정율성에게 새로운 윤리관을 심어주기에 모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위 교육과목에는 유물사관, 변증법, 혁명사, 의열단사에다 당조직문제까지 포함되어 있다. 지금과 비교하더라도 대단히 진보적인 사회주의 교육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마지막에 있는 ‘당조직문제’에서 당은 공산당이며 구체적으로 조선공산당을 의미한다. 분명히 그는 간부학교와 의열단을 통해 사회주의적 윤리관을 새로이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훗날 의열단 임무가 흐지부지됐을 때 정율성이 중국공산혁명의 핵심요지인 연안 행을 선택했다는 점으로 뒷받침된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정율성은 이념으로 무장된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이후 전개된 연안과 태항산에서의 생활에서 특별히 이념을 강조했던 기록이 없다. 사실 사회주의란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대단히 이타적이고 인간적인 가치관이다. 정율성이 받아들인 것은 사회주의적 윤리였지 사회주의 이념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런 정율성의 성향은 의열단 지도부에 의해 체크 되었던 것 같다. 간부학교 2기생 수료생 55명 중 대부분은 국내 및 중국 다른 지역 침투공작 임무를 부여받았지만 어쩐 일인지 정율성만은 남경에 남게 된다. 그에게는 남경 고루전화국에 들어가 상해와 남경을 오가는 일본인들의 전화를 도청하여 보고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의열단이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정율성의 삶에는 실로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일이 생겼다. 그는 남경 한 음악가의 소개로 당시 상해에 머물던 소련 레닌그라드음악원 출신인 크릴노바(Krenowa) 교수에게 성악과 작곡 레슨을 받게 되는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정율성은 주 1회 남경과 상해를 오가며 서양음악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크릴노바 교수는 정율성의 재능을 금세 알아차렸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정율성에게 상해에서 열리는 음악회에서 독창할 기회를 제공했다. 독창 연주의 호응은 매우 좋았고 그 중 가장 좋아한 이는 스승 크릴노바였다. 정율성이 본명 정부은과 가명 유대진을 버리고 ‘음악으로 대성한다’는 뜻의 율성(律成)으로 개명한 것도 이즈음이다. 이로써 정율성에게는 예술가로서의 새로운 삶이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이후 크릴노바 교수는 정율성에게 이탈리아 유학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한다. 그는 머뭇거리는 정율성에게 유학 경비를 조달할 수 있는 방법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정율성은 심사숙고 끝에 유학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음악에 남다른 열정이 있었던 정율성이 이탈리아 유학이라는 행운을 포기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먼저 그는 동지들을 생각했을 수 있다. 동지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역에서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데 자기만 혼자서 유학을 떠나는 결정을 내리기가 인정상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율성이 유학을 포기한 데에는 보다 적극적인 윤리의식이 발동했다고 보아야 한다. 정율성에게 음악은 조국의 독립 못지않게 중요한 과업으로 인식된 것만은 틀림없다. 그는 독립운동과 음악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유학은 두 가지 중 하나를 포기한다는 것을 뜻했다. 즉 유학은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음악만을 선택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었다. 유학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음악은 중국에서도 계속할 수 있는 거였다. 그래서 그는 음악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유학을 포기했을 따름이었다. 결국 그의 유학 포기는 독립운동과 음악 두 가지를 모두 선택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탈리아에 가서 음악 공부를 하는 것은 개인적 성취와 관련되는 일이다. 하지만 중국에 남아 독립운동을 계속하는 것은 사회윤리를 실천하는 길이었다. 역사의식이란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정신이다. 정율성은 역사의식을 실천하는 삶을 선택함으로써 예술가의 윤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니 이것은 보다 높은 수준의 예술 윤리를 성취한 것이었다.

[민족윤리와 이념윤리의 조화]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율성은 의열단 중앙부의 신임을 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본격적인 공작 임무 대신 비교적 한직에 속하는 전화국 도청 임무를 부여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의열단은 민족주의 성향을 경시하면서 공산주의 이념을 더욱 중시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조선민족의 독립이 우선이냐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우선이냐의 문제는 당시 중국 관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직면했던 최대의 갈등이었다. 대체로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사람들은 조선의 독립을 우선시했고 공산주의 성향이 강했던 사람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우선시했다. 이것은 달리 표현하여 민족윤리와 이념윤리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김산을 만난 것은 정율성의 삶에 또 하나의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김산은 공산주의자였지만 계급혁명보다 민족의 독립을 우선시했다. 이후 정율성은 김산의 소개로 비슷한 성향을 가진 중국인 라청(羅靑)을 만나게 된다. 조직과 동지들로부터 소외감을 느끼던 세 사람은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1936년 6월 장명(김산의 가명)은 내가 살던 남경의 한 어민의 집에 와서 한 달 정도 같이 지냈다. 현무호, 계명사, 중산릉 그 어디에도 장명, 정율성과 나 세 사람의 긴 한숨소리와 비가가 담겨 있다.” (라청의 말, 필자 요약)

김산은 정율성에게 광주봉기와 해륙풍에서 목격했던 조선 청년들의 참혹한 죽음 소식을 들려주었다. 김산이 들려준 소식의 요점은 왜 수백 명의 조선 청년이 조선의 독립이 아닌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죽었느냐는 회의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국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시대의 젊은이들은 중국을 버리고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나름 최선의 사업을 도모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정율성은 나청의 제안으로 ‘5월문예사’에 가입한다. 창립총회에서 발기인 중의 하나인 중국인 추취도가 당시 중국의 사회상을 묘사한 시를 발표했다.

5월의 석류화 곱기도 한데
중화의 벽혈(碧血) 더더욱 아름답네
백성들의 원한은 누가 풀고
나라의 수치는 누가 씻으랴
시대의 청년들이여 용감히 앞으로 전진하세

정율성은 이 시에 즉흥곡을 붙였다. 이렇게 해서 창작된 노래가 <5월의 노래>였다. 정율성은 중국인들 앞에서 <아리랑>을 불렀다. 이후로도 그는 진보적인 젊은이들을 모아 노래강습회를 열었다.

이것은 조국의 독립을 우선시했다는 이유로 자기에게 소외의 시련을 안긴 사회에 정율성이 음악으로 대응한 최초의 사례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일정한 성과를 냈다. 정율성의 음악은 이념을 우선시하던 사람들에게까지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이로써 그는 민족윤리와 이념윤리의 갈등을 음악을 통해 해소하는 예술가의 윤리를 체득했다.

(원래‬ 의열단은 동북 길림시에서 김원봉 등 13명의 창립단원이 주도하여 결성한 테러 단체였다. 그들은 암살과 폭파를 주요사업으로 설정했다. 1931년 9.18사변으로 비교적 후방이었던 만주에 최전선이 형성되게 되었다. 그런데 암살과 폭파는 최전선이 아닌 후방에서나 벌일 수 있는 일이었다. 의열단의 본거지가 북경을 거쳐 남경, 상해로 이동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공산주의 혁명이념이 강조되면서 집단무장투쟁을 위한 조선의용대가 결성되었다. 의열단이 모태가 된 조선의용대는 보다 전선으로 다가서는 화북 행을 결정한다. 집단무장투쟁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의용대장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최창익에게 맡기고 자기는 더 후방인 중경을 찾아가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그는 광복군 부사령관과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냈다. 봉오동 청산리 전투를 끝으로 대체로 우파는 테러투쟁을 지향했고 좌파는 집단무장항쟁을 선택하는 쪽으로 변화되었다.

‪(여기서‬ ‘관내’라 함은 중국 만리장성의 동쪽 끝 하북성 소재 산해관을 기준으로 서남, 즉 중국 내륙이다. 따라서 관외는 중국 동북 즉 만주 동북3성을 뜻하는데 1930년대 이후 관외 즉 동북에서는 중조연합군인 동북항일연군이 결성되어 무장항쟁을 이어간 반면 관내에서는 테러와 선전을 위주로 하는 항일투쟁이 이루어졌다.)

(본명‬ 장지락, 김산은 미국 여류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923년 베이징에서 김성숙 등과 함께 공산주의 잡지인 월간 『혁명』을 발간하였다. 1925년에는 당시 중국 공산주의운동의 본거지였던 광주[廣州]로 가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6년 분파주의를 청산하고 통일된 운동을 주도하기 위하여 김원봉 ·김성숙 등과 함께 조선혁명청년연맹을 결성하였다. 또한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민족독립당을 조직하였다. 1927년에는 중국인들과 함께 광둥[廣東] 코뮌 건설에 참여하였으나 3일 만에 중국 국민당의 공격을 받아 해륙풍 소비에트로 철수하였다. 1929년 해륙풍 소비에트마저 국민당 측에 점령되자 그곳에서 탈출하였다.

그 후 조선인의 중국 공산당 입당을 주도하다가 1930년 11월과 1933년 4월 2차례에 걸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는데, 2차례 모두 곧 석방되자 일본의 스파이로 의심받아 중국 공산당에 다시 가입하지 못하였다. 1936년 상하이에서 김성숙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였다. 그 후 연안[延安]에 가서 군정대학에서 가르쳤으나, 1938년 중국공산당에 의해 반혁명죄와 간첩죄로 처형되었다. 45년 뒤인 1983년 복권되었다.)

(라청은‬ 중국 항일투사 겸 음악인인데 정율성을 여러모로 도와주었다. 1976년 정율성이 북경에서 급서했을 때 임종했다. 1937년 당시 그도 김산과 마찬가지로 체포되었다가 출옥했기 때문에 당 조직으로부터 의심을 받는 처지에 있었다.)

[연안, 인민혁명과 조국의 독립]

정율성의 연안 생활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섬북공학, 노신예술학원 수학과 항일군정대학 활동 및 노신예술학원 교수직 수행 등 교육과 관련된 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연안송>. <팔로군대합창> 등의 음악 창작 활동이다.

이것은 정율성이 일관되게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를 조화시키는 삶을 견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섬북공학 재학 중에 <연안송>을 작곡했고 노신예술학원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팔로군대합창>을 작곡했다.

당시 연안은 ‘노래의 도시’라고 말해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연안에서 가장 새로우면서도 인기 있는 활동은 노래 부르기였다. 모두가 기회만 닿으면 목청껏 노래를 불러댔다. 병사들의 노래는 골짜기마다 메아리 치곤 했는데, 특히 저녁 식사 전 황혼 무렵이면 사방에서 들리는 노래들이 절정에 이르렀다.

보탑산 봉우리에 노을 불타오르고
연하강 물결 위에 달빛 흐르네.
봄바람 들판으로 솔솔 불어오고
산과 산 철벽을 이뤘네.
아, 연안!
장엄하고 웅대한 도시
항전의 노래 곳곳에 울린다.
아, 연안!

<연안송>은 정율성의 이른바 출세작이 되었다. 그는 이 노래를 상해 출신 여가수 당영매와 함께 불렀다. 연안 중심지 중앙대례당에 모인 청중들은 <연안송>에 폭발적인 호응을 보였다. 그 자리에는 모택동이 앉아 있었다. <연안송>은 중국 공산당 지도부뿐 아니라 중국의 음악평론가들에게도 항일과 혁명을 위해, 그리고 조국과 민족을 수호하기 위해 수천 리 길을 걸어 연안에 모인 젊은이들의 열정을 예술적으로 그려낸 수준 높은 작품으로 평가 받았다.

이어서 정율성은 최고의 출세작이 된 <팔로군대합창>을 작곡한다. 이 작품의 8개 곡 중에 <팔로군행진곡>이 포함되어 있다. 이 행진곡은 팔로군뿐 아니라 중국 인민들 사이에도 널리 퍼졌고, 1988년 7월 25일 등소평 주석에 의해 <중국인민해방군가>로 공식 지정되었다.

<연안송>과 <팔로군행진곡>의 창작과 성공은 정율성의 개인윤리가 사회윤리로 극적인 확대를 이룬 사례였다. 당연히 연안 사회는 그에게 더욱 큰 사회적 역할을 요구했다. 하지만 정율성은 사회윤리를 실현하는 음악 못지않게 개인윤리를 실현하는 음악 창작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연수요>를 비롯한 수많은 동요와 민요와 가곡 등은 아직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런 노력들을 보여주는 산물들이다.

당시 연안에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각자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혁명전선에 차질이 빚어지게 된다. 대내적으로 국민당군과 싸우면서 대외적으로 항일전쟁도 치러야 하는 혁명군으로서는 단일대오의 형성이 필수 불가결했다.

사회주의 혁명사에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이것은 사회주의 내부에서도 분리되는 좌와 우의 노선투쟁이다. 여기에서 이념을 우선시하는 노선은 좌경화, 민족을 우선시하는 노선은 우경화로 각각 간주된다.

정율성은 먼저 연안에 와 있던 김산을 다시 만났다. 공교롭게도 때마침 정풍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때였다. 정풍운동은 모택동을 비롯한 혁명 지도부가 주도하는 좌경화 운동이었다. 김산은 남경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주도한 적이 있고 정율성은 이 단체에 협력했었다. 게다가 김산에게는 두 번이나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이력이 있었다. 정풍운동은 김산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율성은 김산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후 김산은 사형 당했고 정율성은 조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정율성은 김산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미 저명한 혁명음악가라는 이점이 있었다. 결과 정율성에게 직접적인 징벌이 가해지지는 않았지만 이 일로 인해 그는 혁명의 중심 공간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는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태항산 전선에 투입된다.

정풍운동으로 인한 정율성의 시련은 사회윤리가 개인윤리를 억압한 사례에 해당한다. 하지만 정율성은 사회윤리가 주는 공포감을 극복하면서 개인윤리를 지켰고 이 일로 인한 신변상의 불이익을 수용했다. 그는 일개 병사의 일원이 되어 태항산을 향하면서도 상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요컨대 그는 사회윤리로 인해 개인윤리가 침해당했을 때에도 한 차원 높은 예술가의 윤리를 유지할 수 있는 저력이 있었던 것이다.

[전쟁의 종결과 정율성의 선택]

1945년 8월 15일 미일전쟁이 종결되고 18일 후인 9월 2일 중일전쟁이 종결되었다. 여기서 또 한 차례 정율성의 예술가 윤리가 시련을 겪는다. 그는 이미 중국혁명에 간부로 참여 중인 중국 여인과 결혼했고 자라나고 있는 아이까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조국 행을 선택했다. 물론 이것은 조선의용군에게 부여된 명령 사항이기도 했지만 중국 혁명 수뇌부와 절친한 정율성으로서는 귀국보다는 중국에 남는 선택을 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해야 그는 보다 유리한 창작 환경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정율성은 조국을 선택했다. 다만 그가 선택한 조국은 부모와 고향이 있는 남쪽이 아니었다. 그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있는 북쪽을 선택했다. 이것은 정율성이 끝내 개인윤리와 함께 사회윤리도 포기하지 않았음을 말해 주는 방증이 된다. 대신 그는 남쪽에 있는 어머니를 모셔와 마지막까지 함께 살았다.

2015년 9월 3일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중국 전승절 70주년 행사에서 정율성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이 날 행사에는 총 30곡이 연주되었는데 그 중 3곡이 정율성의 것이었다. 그의 음악은 이미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에서도 연주되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때 평양순안공항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군부대 사열 중에 연주된 곡도 정율성의 <조선의용군행진곡>이었다. 정율성은 2005년 중국 전승절 60주년에 신중국 건국 100인의 영웅 중 6번째에 이름을 올렸다.

정율성이 작곡한 <연안송>과 <연수요>는 여전히 중국 인민들에게 애창되고 있다. 음악의 도시라고 하는 중국 하얼빈에는 안중근 기념관이 건립되기 전부터 정율성 기념관이 있었다. 그의 고향 전남 광주에서는 해마다 정율성 음악제가 열리고 있다.

다만 이러한 화려한 후세의 각광이 예술가로서 정율성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이것은 그가 속했던 중국이 세계적 강국으로 부상하지 않았더라면 아예 벌어지지도 않았을지 모른다는 가정도 얼마든지 성립된다. 결국 정율성의 후세 각광은 그가 선택하고 추구한 사회윤리가 힘을 얻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가 후일 대성했다고 해서 예술가로서의 윤리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북으로 귀국한 정율성에게 닥친 시련과 중국으로 돌아간 뒤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겪은 더욱 가혹한 시련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들은 정율성이 연안에서 겪은 정풍운동으로 인한 시련과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에 쓸 논문으로 유보함을 밝힌다.

대신 이 글의 체계적인 완결을 위해 정율성이 연안에서 태항산으로 행군하다가 겪었던 작은 사건을 하나 소개하기로 한다. 1942년 8월 연안을 떠난 조선의용군이 태항산으로 가는 길은 험한 2,000리 길이었다. 이미 중국의 대음악가로 입신해 있던 정율성은 조선의용군의 병사 대열에 들어 있었다.

정율성의 부대는 황하에서 김두봉 일행과 조우했다. 상해에서 조선 청년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그의 딸 해엽의 얼굴이 보였다. 정율성은 상해에서 그녀와 몇 차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해엽보다도 정율성을 더욱 감격시킨 또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문명철(김일곤의 중국명)이었다.

“명철아, 너 살아 있었구나!” 두 청년은 누가 먼저일 것도 없이 부둥켜안았다. “중국 최고의 작곡가가 바로 너라니, 처음에는 정율성이라는 이름을 몰랐는데, 알고 보니 상해 여관방에서 의열단 대기하면서 함께 지냈던 유대진(정율성의 가명)이가 바로 정율성이라고 해서 얼마나 좋았던지. 요즘 우리 부대에서도 네 노래를 배우고 부르느라 난리도 아니다.”

하지만 두 조선 청년은 이후로 함께 하지 못했다. 문명철은 김두봉 일행이 연안까지 가는 데 호위병으로 차출되었다. 그리고 문명철은 1943년 4월 14일 팔로군과 함께 전선 활동을 하던 중 일본군의 포위망 속에서 전사했다. 29세의 나이였다.

정율성의 친구 문명철은 사회윤리에 투신했다. 이와 달리 정율성은 사회윤리에 모든 것을 다 걸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율성이 사회윤리보다 개인윤리를 더 중시했다고는 볼 수 없다. 다만 그가 문명철처럼 되지 않은 데에는 예술이라는 특별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창작은 률성 동지에게 생명의 한 부분으로 되어 조건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그는 종래로 중단한 적이 없었다.” (정율성 부인 정설송의 회고, 《정율선 평전》)

이처럼 그는 타고난 예술가였다. 부도덕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것은 사회윤리도 아니며 정치윤리는 더욱 아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인간윤리에 속한다. 세상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정율성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예술은 좋은 것과 결합되어야 한다. 예술의 근저에는 지혜와 선(善)이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예술은 나쁜 것을 경멸하지만 한 번도 악의 승리를 제재할 수는 없었다.

이처럼 예술가는 승리한다고 해도 예술가가 추구하는 목적이 승리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 정율성은 예술가의 윤리를 훌륭하게 수행했지만 그가 추구했던 윤리가 승리를 거둔 것은 전혀 아니다. 정율성은 평생작 360곡을 남겼다. 그는 1976년 12월 7일 예술가로서의 삶을 마쳤으며 그의 유해는 북경 교외 팔보산혁명공묘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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