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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꿀 수 있는 100권의 책 38
“넙짜뚜이쭉(入家隨俗)”, 베트남의 역사
김갑수 | 2017-12-29 12:59:1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넙짜뚜이쭉(入家隨俗)”, 베트남의 역사

1945년 8월 말 그는 자신의 민족에게 새로운 나라의 창건을 선포하기 위해 준비해 온 연설문을 마무리했다. 9월 2일 오후가 조금 지났을 때 그는 도시의 서쪽 가장자리, 머잖아 바딘광장이라고 알려지게 될 널찍한 공원에 급히 세운 임시 단상 위의 연단에 올라섰다. 빛바랜 카키색 양복이 그의 바싹 여윈 몸을 헐렁하게 감싸고 있었다. 발에는 고무 슬리퍼를 꿰고 있었다.

수천 명의 군중이 그의 연설을 들으려고 아침부터 몇 시간씩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고향 사투리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높은 음조의 목소리로 나라의 독립을 선포한 다음 새로운 헌법을 읽어 나갔다. 청중에 섞여 있던 소수의 미국인들에게 그의 첫마디는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미국의 독립선언문과 흡사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생존, 자유, 행복의 추구 등이 그러한 권리이다.”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이 바딘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하기까지 거쳐 온 과정은 험난했다. 그 형극의 길은 19세기 멀리 유럽에서 난데없이 쳐들어온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물러나자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으로 기어들어왔다. 프랑스는 여전히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고자 했다. 물론 이들의 방식은 피지배 민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베트남 민족은 외세의 침탈로부터 조국을 보호하는 데에는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군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베트남에는 호치민(胡志明)이라는 놀라운 인물이 있었다. 호치민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베트남 민족은 이후 프랑스의 재침탈을 물리쳤다. 나아가 베트남 민족은 프랑스의 뒤를 이어 침탈한 미국까지 물리쳐 건국 이래 대외전쟁에서 최초의 패배라는 수모를 미국에 안겨주었다.

이러한 역사의 분기점이 된 것이 바로 디엔비엔푸 전투였다. 1953년 5월 인도차이나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앙리 나바르(Henri Navarre) 장군을 이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 무렵 강력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던 베트남군은 프랑스군에게 간헐적으로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 사령관으로 부임한 나바르는 불리한 전황을 단숨에 타개할 전략을 구사하고자 했고, 그 결과 디엔비엔푸 전투를 기획했다.

나바르는 베트남 북부 산악지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베트남 게릴라들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디엔비엔푸에 강력한 요새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 요새는 베트남 게릴라의 거점을 압박함과 동시에 라오스로 연결되는 게릴라들의 보급로를 봉쇄할 목적으로 구축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베트남 게릴라들은 물적 지리적 기반을 상실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프랑스 사령관 나바르는 디엔비엔푸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1만 5,000명이 넘는 병력과 야포 전차 비행중대 등을 배치했는데, 이 모든 것이 그가 부임한 지 불과 10개월 만에 이루어졌다. 특히 디엔비엔푸 기지 외곽에는 49개에 이르는 거점과 이 거점들을 연결한 방어진지를 편성해 사방에서 이루어지는 적의 움직임을 샅샅이 파악할 수 있도록 만반의 경계 태세를 갖췄다.

그렇다면 이 시기 베트남군의 상태는 어떠했을까? 강력한 공군력과 화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에 대항하는 베트남군은 오직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이루어지는 게릴라전에서 우위를 점할 뿐 평야지대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취약한 전황에서 프랑스군이 디엔비엔푸에 강력한 요새를 구축하고 대부분의 병력을 이동시키자 베트남군 지휘부는 역사적인 결단을 강요받았다. 바로 디엔비엔푸를 선공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군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보면 무모하기 그지없는 반면 적국 프랑스로서는 원하던 바였다. 디엔비엔푸 주위에는 베트남군의 거점이 없었고, 특히 그곳을 공격하기 위해 필요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할 변변한 도로마저 없었다.

따라서 막강한 공군력을 보유한 프랑스군에게 모든 것이 노출되고 있던 베트남군이 그곳까지 수많은 병력과 물자를 이동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베트남군은 전투에서의 승리는 고사하고 전투를 유지할 물자와 병력조차 움직이지 못할 처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군은 승리했다.

[우리와 베트남의 차이점]

나의 중요한 관심은 베트남이 어떻게 해서 제국주의 열강인 프랑스와 초강대국 미국까지 몰아내고 통일국가를 이루는 데 성공할 수 있었는지에 있다. 사실 이것을 밝히는 데에는 한 편의 긴 논문으로도 다 말할 수 없는 복합적인 고찰이 필요할 터이다.

첫째, 베트남은 중국과 끊임없이 투쟁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베트남에는 우리처럼 외세를 끌어들인 신라 같은 고대국가가 없었다. 결과 을지문덕 같은 영웅이 우리보다 훨씬 많이 배출되었다.

반면에 베트남에는 근대에 들어 외세 의존, 유인 세력이 나타났는데 그것이 가톨릭 집단이었다. 심지어 교황청마저 인도차이나에서의 교세 위축을 우려한 나머지 베트남보다는 제국주의 프랑스 편을 들어주었다.

둘째,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 체험을 80년이나 한 결과 서양의 실체를 비교적 일찍 알게 되어 서구사대주의가 적게 나타났다. 이것은 한국이 같은 동양권인 일본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일본의 동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대해 터무니없는 선망과 동경을 가지게 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요컨대 베트남 인들은(최소 지식인들은) 서구제국주의의 똥속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다음은 남베트남에 최초로 부임한 프랑스 민간인 총독 르 비르드 빌레가 1881년 12월 본국에 신속한 무력 개입을 건의한 글의 일부이다.

“과일은 충분히 익어 따먹을 때가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따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따든가 산산이 터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베트남의) 후에 조정은 저항은 하겠지만 무능합니다.”

이처럼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베트남을 ‘따먹어야 할 과일’에 비유하고 있다. 베트남인들은 프랑스에 이어 베트남에 개입한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 미국에 대해서도 냉철한 태도를 취해 우리의 서재필, 이승만 부류의 숭미 지도자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남베트남 초대 대통령 지엠은 이승만과 비슷했지만 실제 국민 지지율은 우리와 달리 현저하게 낮았다.

셋째, 베트남에서 베트민은 월맹으로 우리의 북로당 격이고 베트콩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로서 우리의 남로당 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베트민의 지도자 호치민이나 지압 장군의 영도력도 탁월했지만 베트콩 지도자들 역시 사심 없는 애국자들이었다.

베트콩은 베트민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공산당 색채를 드러내지 않고 민족주의를 표방함으로써 남베트남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전략을 수행했다. 결과 베트남의 남과 북 혁명용사들은 최다 54만의 지상군을 파견하고 무한량의 북폭을 퍼부은 초강대국 미국의 전쟁 의지를 분쇄하는 데 성공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박헌영이나 이승엽 같은 남로당 지도자들이 자기 영역 구축을 위해 남로당 빨치산들을 과격한 모험주의로 치닫게 한 나머지 괴멸을 자초한 점과 뚜렷이 대조된다. 실제 미국의 전의를 결정적으로 꺾은 1968년의 ‘뗏(설) 공세’는 전적으로 베트콩이 희생적으로 이룬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크게 보아 세 가지가 베트남이 우리와 다른 점이었고, 이것이 베트남으로 하여금 분단을 극복하게 한 중대한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베트남의 자주적인 민족통일에 대해 경하해마지 않는다. 하지만 베트남의 통일에는 운과 외부적인 요인도 크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베트남의 통일전쟁 성취는 한국전과도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머잖아 베트남은 아시아 수위권의 강국으로 부상할 것이다. 만약 우리도 통일국가를 이루었다면 이미 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수위권의 강국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베트남의 자주적 역사]

베트남의 역사를 간단하게 숫자로 나열하면 1,000년 + 1,000년 + 900년 + 80년 + 30년 + 40년 = 3,050년이 된다.

맨 처음 1,000년 기간은 B. C 1100년 무렵부터 시작된 청동기시대이다. 다음 1,000년은 B. C 111년부터 AD 938년까지인데, 이 긴 기간 동안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 기간은 우리의 삼국시대와 발해·신라 남북조시대에 해당된다.

다음 900년 기간 938년~1865년은 중국 지배에서 벗어난 베트남의 독립왕조시대이고, 이후 1862년~1945년 80년 동안은 프랑스 식민지, 그 다음 1945~1975 30년 동안은 식민지 독립과 통일 전쟁기 그리고 마지막 40년 1975년~2013년 기간은 현대 통일베트남시대가 된다.

베트남에는 중국 한나라의 지배가 시작되기 이전에도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왕조가 있었다. 중국을 재통일한 한 고조는 B. C 196년 베트남의 패권자 찌에우다에게 사신 루자를 보내 그를 남비엣 왕으로 봉하려 했다. 찌에우다는 중국인 관리 출신이었다.

하지만 찌에우다는 중국의 사신을 중국의 예절이 아니라 베트남의 풍속으로 대했다. 그는 머리에 상투를 틀고 다리는 쭉 뻗은 채 앉아서 중국 사신을 맞이했다. 베트남 속담에 ‘넙짜 뚜이 쭉’이 있다.

이는 한문으로 입가수속(入家隨俗), 의역하자면 ‘베트남에서는 베트남의 풍속을 따라야 한다’ 뜻이 된다. 베트남인들은 지역 풍속을 가장 중시한다. 그래서 ‘왕의 칙령도 촌락 문 입구에서 멈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루자 : 당신과 당신 조상은 중국인인데 어찌 이처럼 무례한 행동으로 한을 적대시하는 것이오?
찌에우다 : 남방의 만이(蠻夷) 속에서 오래 살다 보니 예절을 잊었노라. 그런데 하나 묻겠소. 나와 한제(漢帝) 둘 중 누가 더 현명한가?

루자 : 한제는 삼황오제의 업을 이어 한을 지배하는데 인구는 억을 헤아리고 영토는 만 리에 이르오. 왕의 무리는 10만에 불과하고 산과 바다 사이에 섞여 있어 한의 1개 군에 불과합니다.
찌에우다 : 하하. 내가 중국에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의 왕이 된 것이지, 만약 내가 그곳에 거했다면 어찌 한의 황제만 못했겠소?

이것은 베트남이 중국과 대등한 관계임을 강조한 발언이었다. 찌에우다는 중국의 무력 횡포에는 무력으로 응징했다. 그는 결코 중국에 주눅 들지 않았으며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다. 찌에우다의 이런 태도는 이후 베트남의 군주들이 중국과 대동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하나의 원형이 되었다.

찌에우다는 B. C 179년 남중국에서 북부 베트남에 이르는 최초의 통일 독립왕조를 건립했다. 이로써 진정한 의미의 베트남 역사는 찌에우다의 남비엣(南越)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찌에우다가 죽자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AD 679년에 안남국이 세워졌지만 여전히 당의 속국으로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의 중국 지배를 종식시킨 것은 응오꾸엔이었다. 그는 군사를 일으켜 베트남 바익당강에서 중국 함대를 격퇴시키고 응오 왕조를 건립했는데 이것이 AD 938년의 일이다. 이로부터 900년 간 베트남 독립왕조의 시대가 전개되었으며 많은 왕들이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베트남 왕조역사에서 인상 깊은 인물로는 우선 쩐 왕조의 쩐홍다오 장군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지금도 베트남인들에게 신처럼 존경 받고 있다. 그는 1257년, 1285년, 1288년 세 차례에 걸쳐 당대 세계 최강 군대인 몽골족의 침입을 물리쳤다.

다음으로는 명나라군을 격퇴시킨 레러이와 응우엔짜이가 있다. 1428년 그들은 레 왕조를 건립하고 남진정책을 펼쳐 영토를 넓혔다. 하지만 이후 영토가 길어진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분할되었다.

이후 1771년 남부의 떠이선에서 응우엔 삼형제가 거사를 일으켰다. 그 중 막내인 꽝쭝이 농민혁명의 방식으로 중국의 개입을 차단하고 남북 베트남을 통일했다. 그는 현대 배트남인들에게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788년 북에서 발기한 응우엔푹아인이 새로운 응우엔 왕조를 세우고 1802년 탕롱을 점령했으며 수도를 중부 후에로 옮기면서 탕롱의 명칭을 하노이로 변경했다. 응우엔 왕조는 최초로 베트남(越南) 국호를 사용했으며, 베트남 남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캄보디아를 병합하여 지금의 영토를 확정하였다.

[프랑스에 이어 미국 침공]

제국주의 프랑스 군대를 물리친 베트남에 분단의 시련이 닥친 것은 미·영·소·불·영·중국 등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절충된 결과였다. 이런 점에서 베트남은 우리와 또 하나의 닮은 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 민족은 분단 22년 만에 통일을 이루었다.

베트남을 분단시킨 것은 1954년의 제네바협정이었다. 이 협정의 골자는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이북은 북베트남 정부군이, 이남은 프랑스군이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미국은 베트남의 절반이 공산화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채 무력개입은 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미국은 인도차이나에 대한 미국의 접근 방식을 적극적으로 재검토하게 되었다. 결과 미국은 “제네바 협정으로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된 공산세력들은 지역 내 평화를 역설하면서 자신들의 주도권을 행사해 나갈 것이다. 결국 동남아 지역에서의 지도력 상실은 일본으로부터 시작되는 봉쇄망의 붕괴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최종 판단을 내린다.

한편 1958년 토지개혁의 문제점을 해소하여 농촌의 불안을 가라앉힌 하노이 정부는 다시 농업 부문의 급속한 사회주의화를 시도했다. 농업 발전을 위한 토지의 집단화는 40.000개의 합작사 설립으로 구체화되었고 전체 농가의 85% 이상이 여기에 참여했다. 합작사는 농민의 계급 구성을 중시하여 빈농과 중하층 농민이 주도권을 가지고 운영되도록 했다.

이런 정책은 부작용도 있었지만 일정한 성과를 낳았다. 농민들의 열성 참여와 농업 노동력의 협동화, 관계수리의 공동 관리 및 비료의 공동 구매 등을 통해 면적당 벼의 생산량이 증가되었다. 이로써 기아 문제를 해결한 하노이 정부는 자신감을 가지고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여 합작사 확대와 농업 기술의 향상에 주력했고 아울러 공업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미국은 1954년 수상에 오른 반공주의자 응오 딘 지엠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이에 앞서 미국은 모든 원조는 프랑스 당국을 거치지 않고 직접 지엠 정부에 주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프랑스의 권위를 실추시켰다.

미국에 밀린 프랑스는 1956년 4월 인도차이나 사령부의 폐쇄를 공식 선언했고, 그해 9월 마지막 군대가 사이공 항구를 떠났다. 이렇게 됨으로써 하노이 정부는 프랑스 대신 미국이라는 새로운 외세와 대립하는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미국의 지지를 확인한 지엠은 독재정치를 실시하고 부정선거를 자행하여 차츰 민심을 잃어갔다. 특히 농정 파탄은 수많은 공산주의자를 만들어냈다. 하노이 정부는 제네바협정대로 총선거를 하지고 제안했지만 지엠과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는 훗날 ‘당시 선거가 치러졌다면 유권자의 80%가 호치민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지엠 정권은 족벌독재로 치달으면서 공산주의자 색출에 몰두했다. 불만을 품은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이런 가운데 공산당이 주도하는 농민 봉기가 도처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사이공 정부가 지배하고 있던 지역을 해방시키고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시행하는 한편 농민 자위대를 조직해서 지엠 정부에 무력으로 항쟁했다. 농민 봉기와 동시에 공산당은 사이공 정부 관리에 대한 암살과 정부 공공건물과 시설들에 대한 파괴 투쟁을 벌였다. 비하의 뜻을 가지고 있는 ‘베트콩’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북에서는 1960년 9월 개최된 제3차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북부에서의 사회주의혁명 완수와 동시에 미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남부를 해방시켜 국가의 통일을 완수한다”는 결의가 채택되었다.

1960년 12월, 남부공산당은 하노이 측의 권유를 받아들여 남베트남 민족해장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을 결성했다. 그러나 하노이 지도부는 남부에서의 혁명은 무력에 의존하기보다 반 지엠 세력을 결집시키는 정치운동에 주력할 것을 촉구했다.

이것은 베트민 조직에서와 마찬가지로 비공산당원인 민족주의자들을 포섭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런 전략은 미국의 군사개입 가능성을 최소화시킬 것을 기대하는 측면도 있었다. 이때 미국이 집계한 베트콩 지지 세력은 전 국민의 2% 정도에 불과했고 대다수가 농민이었다.

1961년 미국 대통령이 된 케네디는 전임자 아이젠하워보다 베트남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것은 명분상으로는 도미노 이론을 내세웠지만 1949년 민주당 정부의 중국대륙 상실, 그의 취임 전 날 소련 후르시초프가 행한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 지지연설 및 그 자신의 쿠바 침공계획의 미수 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미국은 8년 간 노력을 기울이고 2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했다. 그러나 남베트남 지엠정권의 족벌독재가 지속되는 한 베트남의 상황은 호전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1963년 베트남에서는 반정부시위가 잇따라 발생했다. 특히 6월 11일 승려 틱광득의 분신자살 장면이 전 세계로 생생한 전파를 타게 되자 국제여론은 지엠정권의 부도덕성을 규탄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지엠의 동생 뉴는 단독으로 미국, 북베트남과 동시 접선하면서 베트남의 중립화를 기도하여 미국의 불신을 증폭시켰다.

이런 와중에 응우에 카인이 쿠데타에 성공하여 민 장군을 추대해서 미국의 승인을 얻긴 했지만 미국은 카인이 당파를 자주 바꾼 이력 때문에 그를 별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남부의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하노이 정부는 1963년 12월 중대한 단안을 내렸다. 대담하게도 그들은 하노이 정부군의 남부 침투와 미군에 대한 직접 공격 등을 결정했던 것이다.

케네디가 비명에 죽자 대통령 직을 승계한 존슨은 베트남에 한층 더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미국 군부는 보다 확고한 행동을 취할 것을 건의했다. 합동참모본부는 북베트남 공습을 제안하는 동시에 하이퐁 항구를 봉쇄하기 위한 기뢰 부설을 주장하고 나섰다. 문제는 의회의 동의를 얻기가 어렵다는 데에 있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뜻하지 않은 데에서 풀리게 된다. 1964년 8월 초 그 유명한 통킹만 사건이 발발한 것이다.

이로써 미-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미 공군의 북폭과 함께 지상군 투입이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1년 후 베트남에서는 또 한 차례의 쿠데타가 발발하여 성공했다. 1964년 12월, 젊은 공군 장성 까오 끼와 육군의 반 티에우가 카인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처럼 미국은 베트남에서 두 번의 친미 쿠데타를 조종했고 베트남 참전 구실을 만들기 위해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1966년부터 미국은 매일 164회씩이나 베트남을 폭격했지만 가시적인 성과가 없었다. 1967년 초 영국 노동당 의원 100명이 베트남을 초토화하는 미국의 폭격을 범죄행위로 규정했으며, 4월에는 50만 명의 미국 시민이 뉴욕 유엔 건물 앞에서 반전시위를 벌였다.

그해 10월에는 동부에서 반전시위를 벌인 여 가수 조엔 바에즈, 서부에서 반전시위를 벌인 작가 노먼 메일러가 체포되었다. 그해 섣달그믐인 12월 31일 호찌민은 미국 평화시위자들에게 새해 인사를 보냈고 이에 미 국무성과 국방성은 즉각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1968년 미군은 베트남에서 매주 수백 명의 전사자가 났고 매월 20억 달러의 전비를 지출했다. 이미 53만 이상의 병력을 파견했고 2차세계대전 때보다 더 많은 양의 폭탄을 베트남에 투하했지만 전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미군 총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멀랜드는 승리가 눈앞에 있다며 더 많은 병력과 예산 지원을 요청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의 강심장이라는 미 대통령 존슨은 자신의 지지자 리처드 러셀 상원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베트남전의 어려움 때문에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고 한다.

구정공세는 ‘아무리 전쟁에도 명절은 있는 법’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버린 일대사건이었다. 1968년 1월 31일을 기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베트남 영토 전역 최소 40지역 이상에서 ‘설 연휴 3일 휴전’ 약속을 깨고 대대적인 공세를 벌였던 것이다. 특히 베트콩은 유력한 라디오방송국을 점령하기도 했고 심지어 사이공 미국 대사관 구내에 침투하기도 했다.

유럽의 좌파들은 “작은 후진국 농민군이 세계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초강대국에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극적으로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이 공세에서 실제 피해는 베트콩이 더 크게 입었고 베트민이 기대했던 민중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미국은 보이지 않는 타격을 받았는데 그것은 가히 치명적이었다.

미국은 전쟁의 심리전에서 결정적으로 밀리게 되었던 것이다. 구정공세는 반전운동에 시달려 오던 미국인에게는 오히려 패배를 의미했고 베트콩은 마음만 먹으면 베트남 영토 내 어디든 미군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었다.

미국 국민의 대다수는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순진하다. 그들은 미국이 언제나 승리하고 있으며 미국이 치르는 전쟁은 늘 정의로운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미국 땅에 대도시는 물론 지방 작은 마을에까지 전사자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렇게 되자 메이저 언론은 물론 지방 신문들까지 앞 다투어 미국의 전쟁 피해를 보도하기 시작했는데, 구정공세는 절묘하게도 바로 이런 시점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구정공세 중인 1968년 2월 1일, 남베트남 경찰국장 구엔 곡 로안은 사이공 대로상에서 베트콩 포로 한 명을 권총으로 즉결처분했다. 당시 AP통신 에디 에덤스 기자는 이 장면을 담아 <라이프 지>에 게재했는데, 이 사진은 전 세계로 퍼지게 되어 전쟁의 잔혹성을 충격적으로 알리는 상징물이 되었다.

요컨대 미국 국민들은 ‘우리가 이렇게 재판도 없이 사형을 집행하는 잔인한 정부를 위해 목숨을 걸 필요가 있는가?’라고 자문하게 되었다. 나이브한 미국인들은 전쟁의 공포심을 새로운 정의감으로 쉽게 치환했다.

미국 텔레비전의 반전 보도는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베트남 전선을 둘러보고 돌아온 CBS 엥커맨 월터 크롱카이트는 1968년 2월 27일 저녁 뉴스에서 사뭇 준엄한 목소리로 존슨 행정부의 베트남전 수행은 잘못된 것이며, 미국에 필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협상이라고 단언했다. 이보다 결정적인 사건은 이틀 후 벌어진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사임이었다. 그는 미국의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장관직을 내던진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존슨의 지지율이 하루가 다르게 곤두박질을 했고 급기야 존슨은 3월 31일에 대통령 재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 와중에서 1968년 4월과 6월, 마틴 루서 킹과 로버트 케네디가 연이어 암살당함으로써 미국 사회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한편 대학생들의 반전 시위는 인종 폭동과 겹쳐 격렬한 양상으로 치닫게 되었다.

[미라이 양민학살사건]

새로 들어선 닉슨 행정부는 그동안 미군이 맡던 역할을 남베트남군에 이양하는 정책을 시행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러던 중 1968년 3월 16일에 발발하여 1969년 9월 2일에 세상에 알려지게 된 ‘미라이촌 양민학살사건’은 미국의 반전운동을 더욱 거세게 확산시켰다. 이 사건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과연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라는 회의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미라이 양민학살은 한국전에서의 노근리 학살과 비슷한 성격을 띤다. 안타까운 점은 한국전의 것은 철저히 은폐된 반면 베트남전의 것은 공개되었다는 것이다. 탐구적이거나 양심적인 미국인들은 한국전에서 미국이 어떤 짓을 했는지에 유추하여 베트남전을 추적할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내 반전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던 한국전과 달리 베트남전에서는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어날 수 있었다. 내가 베트남의 통일전쟁 성공은 실패한 한국전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고 말한 이유 중의 하나도 여기에 있다.

어느 날 미 육군 11보병부대 관할 찰리부대의 지휘관 월리엄 케리 중위는 대대장 어니스트 메디나 대령으로부터 이상한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그 부락을 일소하라”는 밑도 긑도 없이 애매한 명령이었다. 찰리부대원들이 헬기 편으로 미라이 부락에 당도해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노인과 부녀자들뿐이었다. 미라이 촌 어디에도 그곳이 게릴라 기지임을 의심케 할 만한 증거가 없었다.

그러나 주민들을 촌락 중앙에 집결시킨 미군은 소녀를 포함한 부녀자 몇 명을 제외하고는 주민들에게 무차별 발포했고, 움막집들을 수류탄으로 파괴했다. 그리고는 따로 남겨 두었던 소녀들을 포함한 부녀자들을 강간하고는 사살했다. 이렇게 해서 학살당한 사람은 560명이었다. 켈리 중위는 혼자서 109명의 민간인을 처치했다.

찰리부대 병사였던 바나드 심슨은 훗날, “그 날 미라이에서 나 혼자 죽인 사람은 25명 정도였다. 여자건 남자건 가릴 것 없이 총으로도 죽였고 목도 잘랐고 머리가죽도 벗겼고 손도 잘랐고 혀도 잘랐다...나는 그냥 죽였을 뿐이다. 내 안에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임무는 성공리에 수행된 것으로 사령부에 보고되었지만 학살 소문은 널리 퍼져 나갔다. DNS 통신사 프리랜서 기자 시모어 허시가 진상을 폭로하고 나섰다. 마지못해 진상조사에 착수한 미 육군은 모든 사안을 비밀에 붙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미국의 자작극, 통킹만 사건]

우리의 비극 천안함 사건은 흔히 메인호 폭발사건에 비유된다. 이것은 1898년 쿠바의 아바나 항(港)에 정박 중인 미국 군함 메인호가 원인불명으로 폭파하여 260명의 승무원이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빌미로 미국은 대 스페인 전쟁을 벌임으로써 제국주의 대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동시에 천안함 사건은 현재 진행 중인 ‘미완의 통킹만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71년 6월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베트남정책 결정 과정’과 ‘통킹만 사건의 명령과 통제에 관한 연구’를 3일 동안 요약, 연재했다. 이것은 국방성 관할 랜드연구소 전 연구원 대니얼 엘즈버그로부터 입수된 1급 비밀문서로서 로버트 맥나마라가 1968년 국방장관직을 사임하기 전에 지시를 내려 만든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 사본을 <뉴욕타임스>에 넘겨 준 대니얼 엘즈버그는 한때 헌병대에 복무하면서 베트남 전쟁을 지지했었는데 랜드연구소 연구원으로서 베트남에 관해 알게 되면서부터 베트남 전쟁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했다.

이 보고서에는 트루먼 행정부 시절 이래의 정치적 기만과 노골적인 거짓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 정부에 치명적이었던 것은 CIA의 사주로 베트남의 고 딘 디엠 수상이 실각하고 처형되기 전에 사이공의 미국대사관에서 본국으로 보낸 전문이었다.

이 전문에 따르면 놀랍게도 통킹만 의회 결의는 이 사건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이미 초안이 잡혀 있었다. 결국 이것은 미국이 베트남 참전에 명분으로 삼은 통킹만 사건이 CIA의 조작이었음을 유력하게 방증하는 자료였다.

(참고) 통킹만 사건 : 1964년 베트남 동쪽 통킹만에서 일어난 북베트남 경비정과 미군 구축함의 해상 전투 사건. 미국이 베트남전쟁 개입을 공개적으로 강화한 계기로 삼은 사건이다. 미국 측에 따르면, 1964년 8월 2일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이 통킹만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미구축함(매독스 호 Destroyer USS Maddox DD-731)을 향해 어뢰와 기관총으로 선제공격을 가하였다.

미 구축함은 즉각 대응하여 1척을 격침하고 2척에는 타격을 가하였다. 주변에서 공동으로 작전을 수행하던 항공모함(타이콘디로거 호 USS Ticonderoga CV-14)도 가세하여 함재기들이 공세를 펼쳤고 함대 구축함(터너죠이 호 USS Turner Joy DD-951)도 공격에 가세하였다.

미국은 이 해상전투를 빌미로 베트남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였다. 당시 미국은 통킹만 전투 이전에도 베트남전에 개입하고 있었다. 8월 7일 미국 하원은 만장일치로 '통킹만 결의안'을 채택하여 베트남전 개입을 본격화하였다.

미국은 북베트남을 대대적으로 폭격했고 해병대를 상륙시켰다. 1971년 미 국방부 펜타곤보고서에 의하면 이 전투는 미국 측이 베트남전 개입을 위해 조작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며, 베트남전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도 1995년 회고록에서 이 전투가 미국의 자작극이었음을 고백했다.
- 이상 두산백과사전 참조

[파리평화회담, 춘계(부활절) 대공세 그리고 통일]

1972년 닉슨은 연말의 대통령 선거를 의식하여 베트남전에서의 추가 철군을 발표했다. 대신 그는 파리평화회담 성사에 관심을 두었다. 미 안보담당 보좌관 헨리 키신저와 북베트남 정부 정치국원인 레득토는 1969년 이래 비밀리에 접촉해 왔지만 양자의 입장차는 확연했다. 미국은 남베트남 정부군 외 모든 군대의 철수를 내세우며 남베트남에 대한 북베트남 정부의 개입 중단과 독립된 국가로서의 남베트남 총선거를 주장했다.

반면에 북베트남은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 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포함한 인민혁명정부의 수립을 요구했다. 이것은 베트남을 하나의 국가로 여기는 북베트남 측으로서는 정당한 요구였지만 미국은 이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북베트남 정부는 협상보다는 무력 해결 쪽으로 기울었다. 초치민의 후배인 레두안을 비롯한 하노이 지도자들은 혁명에 의한 통일이 가능하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1972년 3월 지압 장군은 이른바 춘계 대공세, 일명 부활절 공세를 감행했다. 12만 명의 북베트남군이 소련제 탱크와 대포를 동원하여 휴전선을 넘었다.

이에 맞서 미국은 북폭을 재개하고 하이퐁 항구를 봉쇄했다. 이것은 남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6만 5,000명의 미군을 보호하기 위한 예방조치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결국 하노이 지도자들은 미군 철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우치게 되었다.

1973년 1월 27일 레득토는 미국의 명분을 살려주되 실질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는 평화협상조약에 미국을 서명토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이 조약은 사이공 정부, 하노이 정부를 각각 인정하면서 동시에 남베트남 인민혁명정부(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도 인정하는 유연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기실 이것은 미국이 사이공 정부를 버린 조치에 불과했다.

명분만 그럴 듯한 이 평화조약의 체결로 헨리 키신저와 레득토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지명되었지만 헨리 키신저는 수상한 반면 레득토는 조국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수상을 거부했다.

아무튼 이 조약에 따라 미군과 동맹군은 1973년 3월 말 시점으로 전원 베트남에서 떠났다. 한국군은 2,500명을 남겨 두었다가 1975년 남베트남이 공산화되기 직전에 마저 철수했다. 당연히 남베트남의 민심 불안은 증폭되었고 경제 상태까지 악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74년 8월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퇴임하게 되자 남베트남의 티에우는 강력한 후견인을 잃어 버렸다.

미국의 재개입이 불가능함을 확신한 북베트남은 1975년 1월부터 다시 사이공 정부군에 대한 전면전에 돌입했다. 미국의 지원이 끊기자 사이공 정부에서는 반 티에우 세력이 점증되었다. 하노이 지도자들도 놀랄 정도로 사이공 정부군은 응전도 제대로 못 하면서 너무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

하노이 지도자들은 일정을 당겨 5월 우기가 시작되기 전에 사이공을 함락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4월부터 마지막 최대 공세인 호찌민 작전이 전개되었다. 3월 19일 꽝찌 시가 함락되었고, 25일에는 후에가 함락됐으며, 3월 29일에는 중부 최대 도시 겸 남베트남 제2 도시 다낭마저 후퇴하는 사이공 정부군과 피난민이 뒤섞이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사이공은 공포에 질렸고 벌써부터 미군 비행기는 사이공 정부의 주요 관리와 가족들을 피난시키기 시작했다.

4월 21일 남베트남 티에우 대통령직 사임, 부통령 찐 반 흐엉 승계, 찐 반 흐엉은 북베트남과 협상을 시도하다가 닷새 만인 4월 26일 온건파 즈 엉 반민에게 대통령직을 위임한다. 그리고 즈 엉 반민 역시 협상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마침내 1975년 4월의 끝인 30일, 수도 사이공마저 함락됨으로써 남베트남 공화국은 역사에서 사라졌으며 베트남 전 인민은 민족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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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민폐  2017년12월31일 18시06분    
우리이니 마음대로하소서

이리 말함 갑수옹 가라사데 문꼴 ,빠 ,노빠 대가리 남주고 사는 맹목적 추종 꼭두각시
취급을한다 .
근디 막상 갑수옹은
남의것이 좋아보이는 그 놀부 심보 모택동 호치민등은 찬양해 마지 않는 이율배반은
어찌 이해해야하남
우리이니 총들고 직접 안싸워서 저들과 비교자체가 아니되남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가 우리가 이땅 주인 주권자라는 자각 사회전반에 확산 뿌리내려 우리하나될때
민족통일은
한걸음 더 다가갈것
(19) (-15)
 [2/3]   민폐  2017년12월31일 19시51분    
이젠 그놈의 썩다못해 문들어빠진 이빨삼치기 논쟁보다 힘을 하나로 모아야

남북통일
일제잔제 청산의 당위성을 그 아무리외쳐보아야

위원회에서
개성공단 박양 초법 일방적 결저의 폐혜
위안부 이면계약 불가역적 판단 청와대 일방적 결정 폐혜을 발표하엿다
현실은
자한당, 국당,바당 국회 과반 170여석 넘어 조중동 종편 찌라시들 나라 미래,경제는
어찌하냐고 물고 뜯고 난리가 법썩인 현실

문재인 가진것이라고는 불알 두쪽 뿐이데
여기에서 조차
전교조는 전교조대로
민노총은 민노총대로
이놈은 이런연유로
저놈은 저놈은 저런연유로
갈라지고
찢껴졎다
지금까지의 우리네 모습 역사 엿다

이역사 또다시 다람쥐 챗바퀴 돌자구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돼지 쌔끼도 아니구

2018년 새해에는 더욱 우리 하나되어야
(20) (-12)
 [3/3]   0000  2018년1월1일 23시31분    
기독교를 모함하는 중놈들에게 보라는 글입니다.
보시는이의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띄엄 띄엄 정신병자 그리는것도
그래 네놈 말대로 정말 놀랬다
지구상에 너같은놈은 처음 봤으니까
너같이 더러운것도 처음 보앗고
너같이 악랄한것도 처음 보앗고
너같이 간교한것도 처음 보앗고
너같이 쌍스러운것도 처음 보앗고
아마 네놈보다 더 지저분한 놈은 없을것이다

하나님에게 욕을 퍼 붓는 사악한놈은 들으라
주님 요놈의 사악한놈에게 저주를 내려 주옵소서
그냥 두고 볼놈이 아닙니다.
흉직한 질병의 저주가 내려 주시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옵소서
10여년에서 20여년 사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인간의 의술로는 고칠수 없는
괴질에 걸려 너의 가족 모두가 서로가 원망을 하며 서로가 저주를 퍼 부으며
배고품에 떨며 추위에 떨며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를 하여도 살아나고
또 살아나고 하여 죄의 양을 채울 것이다. 죽일놈아 더 이상 용서는 없다.
나는 네놈의 글를 보면은 용서한다는 말 자체가 하나님앞에 죄스럽다.
이시간 이 후로는 저주가 늘어나면 늘어낫지 용서는 없다.
네놈의 영혼이 불쌍한 생각이 들어 툭툭 털고 죄의 함정에서 돌아 서길
바라는 마음에서 혹시나 하여 권유를 했지만 이젠 없다.

종교의 선택 육의생명 영혼의 생명까지 걸려있다.
죄의 파괴력 행복과 육의생명과 영혼의 생명까지 철저희 파괴 시킨다
만왕의왕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라 네가 사는 길이다.
······
부처가 신입니까?
싯다. 성인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도 사람 우리도 사람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위에 사람없지요.
그렇다면 그는 신이되어 사람들에게 종경의 대상이 되고
우리는 왜 신이 될 수 없나요.
즉 싯다 신 아닙니다 .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재료가 무었이든 부처라고 하는 인형이 신이라면 부처를 만든 사람은
신을 만든 사람이네요,
너무 비하 한다고 생각마세요.
죄송합니다만 부처란 이름은 엉터리입니다.
이 지구상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엄청난 양의 인형들
왜 인형 이지요,
곰도 인형이라고 하구요 개도 인형 이라고 말 하구요,
모조리 다 인형이라고 말 합니다.
그런데 부처 모양의 인형은 인형이라고 말 안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의 고정관념 때문에 그리 말 합니다,
부처가 아니라 역시 인형이지요,
즉 사람이 만든 작품 조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헌데 그 조각 작품이 어떻게 신이 됩니까?
그것이 신이 된다면 곰 인형도 신이요
강아지 인형도 신이요.
온 세상에 있는 인형들은 다 신입니다.
아닙니까?
기독교적 말씀을 드린다면 신은 영물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물 이것들이 신입니다.
그것들이 바로 귀신. 사탄. 마귀.입니다.
역시 하나님도 보이지 안으시는 신이십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신들도 다스리시는 만 왕의 왕이십니다.
그 하나님만이 복과 저주를 주관 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 하나님이 살육을 했다고 수도없이 적어 놨내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것 아닌가!
부처는 살육을 안했는가!
맞아요 살육을 할 수가 없어서 못하는거지
왜 신이 아니닌까?
인간 사회에 두 부류로 나뉘어 집니다.
그것이 뭔가,
진화론과 창조론입니다.
창조론을 믿은것은 물어 볼것도 없이 기독교인입니다.
진화론 자는 기독교인이 될 수가 없지요.
진화론을 생각해 볼까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비하 하기 위하여 닭을 말합니다.
알은 어디서 났냐?
닭이 낳았지!
닭은 어디서 나왔냐?
알에서 나왔지!
이런 비유는 비유할 가치가 없는 겁니다.
....
직설적으로 말 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태어 났습니까 라고 했을때에 부모가 우리를 낳았지.
그러면 여기서도 그 부모는 자식에게서 낳았다고 할수 있습니까?
닭을 비유 하는 것 처럼 사람을 그렇게 비유하는 엉터리는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답은 창조입니다.
....
싯다르스트 의 태생
인도의 북쪽 땅 끝 현제 네팔 영토에
약 2550여년전 카필라 왕국에 전반왕과 왕비 마야 사이에서
태자 싯다르스트가 태어났다.
왕비는 태자를 임신중 친정 석가라고 하는 마을 롬비니라는 동산에
산책을 나갔다가 동산에서 태자를 낳았다.
....
석가의 뜻
석가 마을에서 성자가 낳았다 하여 석가모니 라고 한 것이다.
태자 의 실명 (싯다르스트), 의 (싯달타), 또는 (싯다)의 태생 후 7일만에 모친 사망
왕은 처제를 왕비로 맏이하여 언니가 낳은 조카를 아들로 키웠다.
....
싯다 의 번뇌
13살 때 성 밖의 소풍을 나갔다가 큰 소가 매를 맞으며 밭을 가는데
흙이 뒤집어 지면서 온 갓 벌래들이 꿈틀 거리는데
온 갓 새들이 벌래들를 잡아 먹는것을 또 큰 매들이 새들를 잡아 먹는것에
충격을 받아 번뇌에 빠진다.
고민속에 빠진 태자 수년간 계속되자 부왕은 데바다하 의 성주의 딸과 19세때 결혼
그러나 실패 다시 총명하고 영득한 청소녀들을 시중 들게하여 줄기게 하였지만
또 실패 다시 삼시전을 걸립 삼천여명의 궁녀들를 소집 춤과 노래를 들려 줬지만
또 실패 부왕은 군사를 시켜 보아서는 안되는것 모두 다 치우라는 명령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의 환영 속에 행진 그러나
호호 백발 노인이 쓰러질듯 쓰러질듯 비틀 거리며 지팡이에 의지하여
초라하게 걸어가는 모습 한번도 그러한 모습 못 보았던 태자
더 큰 시름에 잠겨 궁으로 돌아온 얼마 후 남문으로 산책
이번에는 병들어 죽어가는 애초로운 모습
서문에서는 역시 처음보는 장사 행렬
북문에는 요상한 도포를 입고 지팡이를 집고 빈 그릇을 들고 밥을 얻어 먹으며
고행하는 행인들 여러 가지 대화속에 자신도 가출 하려는 결심
아버지는 말렸으나 뜻을 굽히지 않는 태자 할수없이 한가지 뜻을 제안
왕위를 이을 왕손을 보게하고 가라 태자는 승낙 얼마후 아슴다라 라고 하는
아들를 생산 후 2월 8일 29세때 가출
....
고행 길
6년동안 삼씨 한알과 보리 한알로 연명을 하였다고 한다.····
삼씨가 고구마인줄 아는가 보리가 감자인줄 아는가 당신은 믿을수 있는가?
혹 60일이라면
6년을 고행을 했어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수행 방법을 바꾸기로 결심
밥을 먹고 기력을 찿은 후 보리수 나무 밑에서 정 자세로 앉아 뜻을 이루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 7일 동안 앉아서 머릿속에 생각나는 모든 잡념을
물리치고 눈을 감고 있으니 마음이 가벼워 지고 마음 문이 열렸다고 한다.
아녹 다라삼.................위의 없는 바른 께달음 ...그 이상 최고 께달음이 없다.
즉 인간은 한계를 넘을수 없다····이것이 답입니다.
막삼 보리
무상 정서정 대성 불타가 되었다고 한다
80세 되던 해 2월 25일 법 왕국을 건설 했다고
····
점장이 유래
신돈이라는 승려가 점을 잘 치므로 고구려 공민왕이 신임을 하였다고 한다
눈치가 빠르고 머리의 회전이 빠르고 생각이 빠르면 점을 잘 친다고 한다
공민왕이 인정함으로 인하여 유래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한다
····
점치는 방법
사람의 모습. 옷차림. 행동. 언어. 등등을 잘만 파악하면 족집게 보살로 인정 한다고
승려들이 포교 활동에서 문제 하나만 집어내면 그 다음부터는 슬슬 풀린다고 한다
무당 굿 유래
....
즉 싯다가 아니라면 불교의 불자도 존제하지 않습니다.
싯다 로 인하여 불교라는 하나의 종교가 창립이 되었는데요,
하나의 철학이라고 볼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
부적
무당들 한데 속지마세요.
승려들 한데 속지마세요.
점줄가들 한데 속지마세요.
....
이 글에 관련되신 분들 기분 나쁘시쇼.·
허나 깊이 한번쯤 고민 해 보세요.
즉 기독교 서적과 불교서적과 무속들의 서적등등
깊이 연구해 보세요.
여러분의 육의 생명과 영혼의 생명이 관련 된 심각한 문제입니다.
....
사람이 아무리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다 하여도
IQ 가 200이요 아니면 300이라 할지라도 영의 세계를 볼수 있는것이 아니지요.
영의 세계를 본다라는 것 부터가 거짓말입니다.
또는 사람의 능력이 귀신의 능력을 능가 한다고 생각 합니까?
또는 인간이 IQ가 1000이라 할지라도 귀신을 능가 할수는 없지요.
누가 과연 귀신 보다 더 똑똑하다고 말 할수 있습니까?
귀신들도 사람처럼 자라서 늙어 죽습니까?
귀신들이 이것 저것 먹고 사는 겁니까?
어느 무당이 귀신은 일년에 두번 먹는대요.
귀신도 처먹으면 똥 쌀텐데요. 엉터리··· 무당.
귀신들이 사람이 오라하면 오고 가라하면 간다고 생각합니까?
귀신들. 사람들의 농간에 놀아나는 멍청이 아닙니다.
귀신들이 사람들를 볼때에 사람들은 지꽤에 지가 넘어가는 꼴입니다.
....
귀신들이 눈에 안보인다고 온갖 거짓말를 쏟아내는 무속인 들이여
사람답게 사세요.
....
인터넷에 엄청나게 쏟아저 나오고 있습니다.
부적에 대하여 검색을 해 보니까?
부적 의 수를 아예 셀수가 없습니다.
이 엄청난 부적들 때문에 귀신들이 초비상 걸렸겠네요!
단언 하건데 귀신들이 부적으로 인하여 떨지 않습니다.
장담하고 또 장담 하거니와 귀신과 부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마치 예날 천주교에서 천국가는 티켓을 파는 것 같이.
비싼것 사면 좋은데, 싸구려 사면 안좋은데,
여러장 사면 지옥에 있는 영혼들까지 천국으로 갈수 있다고,
이런 사기가 또 어디 있습니까?
지구상에 종이가 몽땅 부적이라 할지라도 지구상에 귀신들 눈도깜박 안합니다.
인간들의 부적 장난에 놀아 난다면 그게 어찌 귀신이라 할수 있습니까?
다시 말씀 드리지만 부적과 귀신은 아무상관이 없습니다
....
처용설화 엉터리 엉터리 이런 엉터리가 없습니다.
귀신이 처용의 아내가 너무 예뻐서 사람으로 둔갑하여 처용의 아내를
성 폭행을 하고 있는데 처용이가 봤답니다.
처용은 귀신임을 알아보고 처량하게 울면서 하소연을 하니까?
귀신이 미얀하여 한가지 약속을 했는데요 그약속이 처용의 얼굴 그림을
그려서 대문에다 걸어두면 그집에는 안들어간다고 약속을 했답니다.
그때부터 부적이란 농간이 시작된겁니다.
그떼부터 무당. 박수. 중놈들이 온갖 명목의 부적을 조작해 팔아먹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까지는 주십종에 불가 하던것이
지금은 수백 주천의 종류가 쏫아지고 있는것입니다.
한마디로 개가 웃을일 아닌가요.
제가 승려나 박수나 무당들을 비하하려고 이글을 쓴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면 그때의 귀신이나 지금의 귀신이나 같은것 아닌가요.
그러면 그렇게 믿으세요.
제가 손해 보는것 아니니까요.
즉 귀신들이 그런짓을 했다라고 한다면 왜 지금은 그런일이 안일어 납니까?
장가도 못가고 죽은 총각 귀신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여러분 부적에게 속지 마세요.
사기입니다. 사기라구요.
....
잉금이 절를 지여준다 하니까?
바다에서 용왕신이 아들 일곱을 데리고 나와
임금에게 감사의 풍악을 올렸답니다.
잉금이 용왕신의 아들을 잉금의 아들로 삼고 세상에서 결혼까지 하여
한 지역을 관리 하게하였는데 얼마나 잘하였는지.
그 지역 사람들 평화를 누렸답니다.
보세요! 귀신들이 무순놈의 아들이 있고 딸이있습니까?
그러면 마누라도 있겠네요.
또 할머니 귀신도 있고 할아버지 귀신도 있겠네요.
귀신들이 사람 앞에서 춤을추며 풍악 놀이를 한다.
그야말로 귀신이 씨 나락 까먹는 소리 하네요!
승려들이나 무당들 한데 귀신들은 몇 살까지 살다가 죽나 알아 보시쇼
또는 귀신들은 어떻게 죽고 장래는 어떻게 하는지 물어 보셔요?
·····
귀신들은 여자 남자 성이 없읍니다·······
중성입니다.
귀신들은 성장 하는것도 아니요 늙은것도 아니요 죽음이란 없습니다.
용왕신 굿이 해석한다면 용왕 신이란 없습니다.
용왕 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용왕 신이라고 이름을 지어 놓은것입니다.
만약 용왕 신 아들이라면 용왕이 신이니까
아들도 신 귀신 그런데 사람과 결혼하여 산다구요.
구라도 아니고 뻥도 아니고 귀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사실화 하여
대대적으로 사람들를 미혹하며 부적 사기를 칩니까?
점술가들 승려들 무당들이여 아무리 돈 벌기 힘들다 하여 먹고 살기 힘들다하여
꼭 그렇게 사람들을 속이며 살아야 합니까?
이땅의 임금이라 할지라도 귀신들이 볼때에는 보잘것 없는 한 인간 일 뿐입니다.
이땅의 인간의 권력이 귀신에게도 통한다고 생각합니까?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
부적중에 독수리 부적이 있더군요.
하기야 무슨 부적은 없을까마는
독수리는 날쌔고 힘도 쌔고 하늘에 왕이라 하지요.
그래서 독수리 부적이라는 이름이 나왔답니다.
독수리 부적은 악귀가 나타나면 잽싸게 낚아채어 혼을내어 쫓아 보낸답니다.
그림 독수리가 보이지 않는 귀신을 잡아 혼을낸다.····
사기치지 마세요
독수리 부적은 다리는 정상 몸도 정상인데 머리가 세 개입니다.
그 이유 사방을 한번에 보라고 그렇게 그렸답니다.
부적이 귀신을 쫏는 능력이 있다면 앞에서 오나 뒤에서 오나
그것을 몰라서 머리 세개를 그립니까?
아마 멍청한 귀신만 오니까?
부적을 봐야 알아채고 도망 가는가 봅니다.
귀신이 왜 귀신입니까?
귀신은 영물입니다.
영은 시간도 공간도 없는겁니다.
사람은 시간과 공간이 있기 때문에 1m전방도 가지않으면 뜻을 이룰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은 시간과 공간이 없기 때문에 부산이요. 미국이요.
세계 그 어디든 갈 수 있고 세계 어디에서 동시 다발로 열군데요? 백군데요?
그 이상도 속속들이 다 알수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까짓 부적 따위를 보고 도망가요?
보세요 귀신은
촛 불 에서도 나올수있구요.
책 속에서도 나올수 있구요.
밥을 먹는 밥 속에서도 나올 수 있구요.
물그릇 에서도 나올수 있구요.
천장에서도 나올수 있구요.
벽에서도 나올수 있구요.
어디에서도 못나오는곳이 없습니다.
더 정확한 말 당신들 마음 속에서도 나올수 있습니다.
당신들 가족 누구에게도 귀신들이 들락 날락 합니다.
그런데 대문에다 붙인다고요.
문앞에다 붙인다고요.
농에다 붙인다고요.
부엌에다 붙인다고요.
정신병자들 대부분이 불교인들입니다.
정신병자 집 안을 살펴보면 구석구석 부적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습니다.
그렇게 부적들이 도배가 될 정도로 부적들이 붙어 있다면
정신병이 나아야 되는것 아닙니까?
그런데 정신병은 점점 더 심해지내요
더 이상 속지 마세요
····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말씀, 진리의 말씀, 진실를 말하는 데도 어쩌면 그렇게 귀를 틀어막고
듣지 않을려 하시면서 그 엄청난 거짓말, 사기치는 말,
자신들을 속이는 말은 그렇게 잘 믿고 몇천원에서 몇백만원 천만원 이상도
돈을 주고 부적을 사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굴까요?
춥고 배고픈사람 일까요?
아니면 중병에 걸려 죽을날만 기다리는 사람일까요?
정말 불쌍한 사람, 진실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
옛날 중국 무창 장씨집에 아들이 결혼을 했는데요,
신부가 얼마나 착하고 예쁜지 가족들은 물론 보는이마다 칭찬을 했답니다.
예절 바르고 지식이높고 하여 나라의 회종황제 까지 그를 불러 칭송을 했답니다.
그때 임금이 친필로 쓴 부적을 시아버지에게 주면서 대문에다 붙여라.
시아버지가 집에와서 대문에다가 매의 부적을 붙이는 순간
뒤따라 들어오던 며느리가 부적을 보더니.
본색을 드러내며 마당에 나뒹굴어지는 순간 여우로 변했답니다.
엉터리 엉터리 여우가 사람으로 변한다는 엉터리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천년을 묵었는지 오백년을 묵었는지 여우는 짐승이지요. 귀신이
아니질 않습니까? 부적은 귀신을 쫏기위한 부적이지 짐승이 왜 곤두박질 칩니까?
또하나 며누리가 귀신이였다면 임금이 부적을 붙이는 순간이 아니라
임금을 만나기 전에 독수리 부적을 그려서 시아버지에게 줄거라는것도
이미 알고 있는것이 귀신입니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대문에다 붙이니까 그제서야 부적을 알아보고 곤두박질칩니까?
귀신이 아니라 사람도 눈치 빠른놈은 알아 보겠네요.
이때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매 부적을 선호 한답니다.
여러분 거짓말도 엉터리 거짓말······
이것은 사기입니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옌날 이야기를 사실화 시킨 부적 사기이지요.
또는 누구에게나 9년마다 불운액이 정기적으로 온답니다.
따라서 불운 액 부적을 사서 지갑에 넣고 다니면 액을 물리칠 수가 있구요.
만에 하나 꺼내보면 효력이 사라진답니다.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여 사기를 처도 분수가 있지요.
효력이라는것이 안보면 붙어있고 보면 사라지고
이런 퉁딴지같은 말로 사기치지 마세요.
또 강력한 부적이 있는데요.
옥추경 부적을 사서 어떠한 주머니에 동전 몇닢과 부적을 넣어
지붕위 대들보 밑에 넣어두면 귀신의 뼈까지 녹는다고 합니다.
귀신들도 뼈가 있나봐요?
이 부적은 무당들도 두려워 한답니다.
말이 됩니까?
이러한 거짓말들을 진실인양 사람들에게 광고하며 유혹 합니다.
해괴한것이 또 있습니다.
남자 나이 10세 여자 나이 11세 되면 9년마다 찾아오는 불운 엑이 있답니다
귀신 신분 제운직령을 쫒기 위하여 짚으로 허수아비
즉 사람을 만들어 옷을 입혀 그 안에 노잣돈 동전 몇잎을 넣어
(干支) 간지 를 적어 멀리 세갈렛길에서 불살라 액을 막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허구 맹랑한 수천 수만가지의 부적을 팔아먹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점줄가들이 대체적으로 섬기는 귀신들의 명칭이랍니다.
....
(옥황상제, 용선생, 용신, 임경업장군, 작두장군, 잡귀잡신, 조상신,
지리천문장신, 지하장군, 창부씨, 최영장군, 칠성신, 태주호구별성,
걸립신, 객귀, 감흥실령, 가망, 금성대왕, 군웅, 관성제군, 단종신,
단군신, 남이장군, 마마신, 대감신, 사신, 불사할머니신, 선녀동자,)
등등 이 외에도 20여 종류의 귀신들의 명칭이 더 있습니다.
....
요 귀신들이
나는 마마신이다. 나를 잘 모셔라.
나는 최영장군신이다. 나를 잘 모셔라.
나는 대감신이다. 나를 잘 모셔라.
등등 아마 귀신들이 무당들 승려들 앞에 나와서 관등 성명을 댄나봐요.
그러니까 귀신들의 이름을 알지요. 보이지 않는 신들의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
부적은 (입시부적, 시험부적, 합격부적, 면허부적, 결혼부적, 질투부적,
싫어하는 사람 떨어지는 부적. 눈에 가시부적. 대박부적. 예방부적. 도둑 방지부적.
등등 약 천여 종류가 되는것 갔습니다.
김해경 박수무당은 1979. 2. 23일 단군학교 개교후
1993. 7. 19일 단군 학교를 해산 한 김해경무당 즉(무당대학)
김해경 박수무당을 모르면 무당이 아니랍니다.
....
문화방송에도 수차례 초청받아 무속에 대하여 대담을 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의 신이 함께 함과 영서를 쓰는것까지 생 방송으로 방영이 되었답니다.
박수무당들을 만 이천여명을 거느리는 무당 대부였답니다.
박수무당 김해경 개종 첫마디, 신의 역사로 했던 역학을 체계적으로 배워서 했던
결국 사람을 미혹하는 행위일 뿐이라고 하며
효과가 있건 없건 하나의 술수라고 고백합니다. 라고 실토했습니다.
....
믿거나 말거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토록 귀신들을 추종하시면 인생의 말년에 귀신들 또한
여러분을 놔 주지를 않습니다.
....
결국 대부분이 정신질환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
네이버에 이런 내용을 올렸지요.
그런데요 네이버에 아예 로그인을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들이 진실이라면 정정당당 하게 사기가 아니라면 정말 떳떳 하다면
창을 막는것이 아니라 어떠한 설명을 하던지 만나서 끝장 토론을 하던지
대국민들에게 아니면 아니다 설명을 해야지요 명예 휘손으로 고발를 하던지
왜 로그인을 못하게 창을 막을까요. 사기가 들통 나니까?
거짓이 들통 나니까? ······· 저들은 부적 사기꾼들입니다.
....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세요. 당신이 사는 길입니다.
·····································
그래 간통죄 패지 되어 목사들 좋아 한다고 했느냐.
네놈들이야 말로 간통죄 페지되어 춤을 추겠구나 더더욱 창녀 소굴에서
잔뼈가 굴었으니 아예 절간 내에서 창녀 판을 벌려라.
그깟 부처대가리 눈깔이 있으니 보기를하나 귓구멍이 있으니 듣기을하나
팔 다리가 있으니 일어 서기를하나 이조 시대떼 처럼 해보거라.
네놈의 가족 총 출동하여 창녀 판 벌려바라.
산속 절간들이 조용하니 정말 딱이겠다 요놈의 호로색기야
월래 짐승들은 산과 들에서 살아야 제멋 아니냐?
네놈의 조상은 원숭니까 원숭이 색기들이 오백년을 묵었는지
천년을 묵었는지 어찌 사람으로 둔갑하여 산단 말이냐?
속히 산속으로 기들어가서 사람에게는 그러지 말고
원숭이 후손들만 끌어들이어 공기 좋고 물 맗은 절간 부처대가리 밑에서
창녀촌 벌이거라.
....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악인은 악을 행하면서도 께닫지 못한다고 하셨다.
....
진화론을 믿는 심령들이여 원숭이가 조상이라고 생각한다면 부끄러워 하지말고
다음글에 화내지말라,
진화론자는 자신의 어머니 암컷 원숭이 아버지 숫컷 원숭이
자신은 여자이면 암컷 원숭이 남자이면 숫컷 원숭이 자녀들은 원숭이 색기들
창조론은 사람으로 창조 되었으니 조상들 모두가 조상님들
후손들 역시 대대로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놈의 글에 찬성하는 자들은 조상들도 원숭이 자신도 원숭이 후손들도 원숭이
반대 하시는 분들은 조상님들도 본인도 후손들도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
그놈이 쓴 글 : 종교갑질. 통일대박. 정신차려야한다. 사기 치지 말아야한다.
진실충격. 정직하게 살자. 홍익인간. 애도안다. 등등··한 20여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되질려고 작정한 놈인지 하나님에게 욕을막 퍼부어요.
....
네놈이 그리 간교하게 더럽게 글를 쓴다면 나 역시 그리 쓸 수밖에 없다.
....
너 말 잘했다.
여자들 정신 차리라고
그래 여자들 정신 차려야지
불교는 부처가 신이다.
이놈의 부처는 지 앞에서 해괴한 짓을 해도
귀가 있으니 듣기 를 하나 눈깔이 있으니 보기를 하나
입이 있으니 말 을 하나 팔 다리가 있으니 일어 설 수 가 있나
지 앞에서 중놈이 여자의 옷을 벗기고 해괴한 짓을 하는데도 묵묵 부담
차라리 허수아비는 바람이 불면 옷이나 펄럭이지
여자가 중놈에게 강간을 당해도 꼼짝 못하는 부처
그런 부처 앞에서 누가 과연 부처를 두려워 하며 몸을 사리겠느냐!
강간당한 수많은 여인들 바로 그 허수아비 만도 못한 부처 앞에서
중놈들에게 반항도 제대로 못하고 당하는 것이다.
왜 반항을 못 할까?
중놈이 상담을 할 때 보살님이 100배 200배~400배 등등 정성을 다하여 절를하면
부처님이 보살님의 정성을 보시고 보살님의 소원을 들어 주실겁니다.
절를 시작하면 중놈은 구석 구석 향을 피운답니다.
문제는 200배도 못하여 지치면서 향에 취하여 쓰러 진답니다.
이때를 노린 중놈들은 목탁을 두두리며 몆번의 염불를 외우다가
여인에게 다가가 옷을 벗긴답니다.
이미 여인은 지치고 향에 취해 있기 때문에 반항은 불가능한 상태 랍니다.
여인의 옷을 주저 없이 벗기는 중놈들
많이 해본 솜씨라 약간의 거브 반응만 나타나도 사정없이 구타
중놈은 마음껏 몸 전채를 추한변태 성욕 음욕을 채운 후 쪽지를 써놓고 나간답니다.
여인의 온 몸은 중놈에게 마음과 몸은 짓발펴 젔고 힘겹게 몸을 움직이여
강제로 벗겨진 옷을 입으려 하는데 쪽지가 보입니다.
쪽지 내용을 본 여인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충격 무시무시한 협박
그때부터 여인은 중놈들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하는
중놈들의 성노리게 가 된 여인들
개색기야 아니라고 할래 몰랐다고 할래 아니면 잡아땔래
개색기야 고구려가 왜 망했냐 네놈이 더 잘 알것이다.
이조 시대 때 마을마다 절간들이 들어서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을 농락 했는가?
아니라고 할래 몰랐다고 할래 개색기야
요놈의 중놈들이 권력과 짝하여 양반 행세는 물론 수많은 종들를 부리며
유지 행세를 하며 힘없는 백성들를 농락하며 토지를 온갖 명목 즉 돈 몇푼
빌려주고 값지 못한다고 빼앗아 비싸게 토지를 착취하는 방법으로 힘없는
국민들를 얼마나 괴롭폈냐?
모든 관직의 자리를 얻을려면 중놈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상태
울며 겨자 먹기로 부인네들이 남편의 관직을 위하여 반 강재로 몸을 허락 했다
개색기야 한번 반강재로 몸을 허락하면 이때부터 몸을 요구해도 거절못해
돈을 요구해도 거절 못해 온갖 보물은 절간으로 쓸려 갔으니 나라의 재정보다
절간이 훨신 더 많으니 중놈들이 직장을 다녀 돈을 벌었냐?
사업을 해 돈을 벌었냐?
힘 없는 백성들의 착취가 아니고서야 어디서 돈을 모았냐 개색기야
이색기야 이개 정상이냐 지금 현제도 온갖 국보나 골동품이나 돈은 국가보다
절간이 훨신 더 많을 것이다 지식인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개색기야
네놈이 입이 있느냐 아니라고 할래 몰랐다고 할래
얼마나 중놈들이 여인들를 농락 했으면 마을마다 여인들은 절에 가지 말라고
잉금이 어명까지 내렸겠냐 요놈의 쥐색기 같은 놈아
누구던지 네놈의 글과 나의 글를 보면 판단이 설 것이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누가 진실인지!
....
똑똑히 들으라 쥐색기 같은놈아
기독교는 이 땅에 들어오면서
첫쩨는 교회를 세웠다·····
교회가 세워지므로 사람위에 사람없고 사람밑에 사람없다는 즉 주안에서는
형제요 자매요 한 가족이라는 즉 종이 어디있고 상전이 어디 있느냐?
말씀 교육으로 양반과 종의 체계가 무너젔다 .
요놈의 쥐색기야 헌데 불교는 천년이나 먼저 기어들어와 각종 부적으로
사기만 치고 각종 무당굿으로 무지한 국민들의 주머니만 털고
마을마다 중놈들은 지역의 유지행세와 종들를 부려 먹그며
백성들의 피와 땀을 착취를 했다 요놈의 쥐색기야
....
둘쩨는 학교를 세웠다········
극히 일부인 양반들만 배우는 법도를 무색하게 하고
누구나 배울수 있는 학교가 세워지므로 대 국민들의 까막눈인 국민들를
눈을뜨게 하였다 요놈의 구데기 색기야
....
셋쩨는 병원을 세웠다·····
선교사들이 병원을 세우기 전에는 우리나라에 병원이 없었다 강아지색기야
온갇 이질병 전염병등으로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아예 치료가 뭔지도
모르고 죽어갔냐 치료라고 해야 침 몆번이 전부이고
헌대 병원이 세워지고 서양문화 즉 의사 선교사들이 대거 들어와
한국 사람을 의술 을 가리키어 배출함으로 죽어가는 국민들를 살렸다.
서양 의사 선교사들의 순교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문화는 없었을 것이다,
....
헌데 네놈들은 배운망덕도 유분수지
불교계 내에에········
반 기독교연합. 기독교 말살연합회. 기독교 해채연합회. 등 기독교를 해채하기 위하여
열 몆개의 단채가 있더구나 미친놈들 미처도 단단히 미첬어
오냐 짊문한다
느그들의 불교가 그리도 자랑스러운 종교라면
그렇게 올바른 종교라면 천년이나 먼저 들어 왔으매도
어찌하여 학교나 병원은 고사하고 백성위에 굶림 하면서 수많은
힘없는 백성들을 종으로 부려처먹은냐 이색기야.
뿐만 아니라 단 한푼의 노역비도 주지 않고 종들을 지놈들의 재산으로 여기며
이리저리 돼지색기 팔아 처먹듯 사람을 그리했느냐 이개색기야
왜놈 침략 때에는 친일파가 되어 나이 어린 여자들을 꼬득이어
술집이나 창녀소굴에 팔아먹고 이것이 불교의 현 주소가 아니더냐 이놈아
아니라고 할래 몰랐다고 할래
이러한 사실 지식인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개색기야.
불쌍한 놈들 분명희 말 하마 어떠한 짓을 하든 네놈들의 죄만 더 커질 뿐이다.
....
이놈아 똑바로 들으라·········
로마가 기독교를 완전 해채하기 위하여 기독인이 보이는 쪽쪽 잡아 죽였지만
오희려 기독교가 번창시키는 전하 위복이 돼었느니라
즉 기독교 방해하는 단채가 천개라 해도 눈도 깜박 안한다.
다만 네놈이 신성 모독만 아니라면 이웃집 개소리로 치부하고 만다
그래 네놈 말데로 정말 놀랬다
지구상에 너같은놈 처음 봤으니까
너같이 더러운것도 처은 보았고
너같이 악랄한것도 처음 보았고
너같이 간교한것도 처음보았고
너같이 쌍스러운것도 처음보았고
아마 네놈보다 더 지저분한놈은 없을것이다
....
종교의 선택 육의생명 영혼의 생명까지 걸려있다.
죄의 파괴력 행복과 육의생명과 영혼의 생명까지 철저희 파괴 시킨다
만왕의왕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라 네가 사는 길이다.
(1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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